한국일보

실내악 음악이란 “원래가 실내화를 신고 하는 것”

2014-10-17 (금)
크게 작게
실내악이란 소위 클래식 음악이라 불리우는 서양 음악의 한 장르로서 근대 유럽의 귀족 등, 당대 부유층의 가정음악에서 발전되어온 소규모의 음악 연주 형태이다.

이는 적은 숫자의 악기군과 때로 성악이 함께하며 부유층의 사교방에서 주로 연주되던 형식이었다. 헌데 서양 음악사에 나타난 일련의 새로운 현상들도 결국 당대의 사회적 움직임과 맞물려 일어나는 것들이니 실내악 음악의 발전도 예외가 아니다. 실내악 음악의 태동과 발전은 그렇다면 어떠한 사회적 요청에 부응한 것인지 한번 살펴보자.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지배권을 행사하던 교회로부터의 독립의 움직임은 근대로 이행하는 16세기에 급속도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기악 음악의 확장, 부유층의 가정음악의 확산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세 시기 교회 음악은 사람의 목소리를 (물론 남자의 것만) 으뜸으로 간주했으며 기악음악은 덜 ‘성스러운’ 말하자면 좀 질이 떨어지는 분야였다.


게다가 중세 당시 음악은 교회의 전유물이었으며 궁정이나 대귀족의 저택의 오락용으로 혹은 거리의 술집에서도 음악이 사용되긴 하였지만 엔터테인먼트에 불과한 세속음악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거룩한 교회 음악의 권위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따라서 훌륭한 음악가라 하면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 첫째 영광이요 기악음악 나부랭이는 성악을 반주하는 기능 외에는 딱히 중요성을 갖지 못하던 시기였다.

무려 천년이라는 긴 시기를 차지하였던 중세의 사회구조는 신분 상승을 꿈꿀 수 없던 닫힌 계급 사회였다. 그러나 중세기 말엽, 생산성의 향상으로 인해 점차 급속한 산업화가 일어나자 중세 봉건 사회의 계급 체계를 지지하고 있던 경제 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더하여 15세기말 콜럼버스 등이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면서 16세기의 상업, 무역은 이전에 볼 수 없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보니 상업을 통한 부유한 평민층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소위 중산층을 형성하게 되면서 서서히 새로운 권리를 요구하였다. 이들은 종교 개혁을 열렬히 지지 하였으며 (중세기에 평민들은 미사를 멀찌감치에서 ‘보기만’ 했을 뿐 ‘드리지’는 못하였기 때문) 이전에는 넘볼 수 없던 귀족들의 문화생활을 공유하기 시작 하였다.

게다가 이 시기에 일어난 일찍이 없었던 혁명적 사건, 즉 음악 인쇄술의 보급은 악보를 손으로 베껴 써서 전달하던 기존의 방식에서 빠른 대량 생산으로의 변화를 가져왔는데 이는 부유한 중산층의 음악 활동을 격려하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하였다. 이와 같이 중세를 탈피하는 과정에서 음악의 수요 저변은 성악 중심의 교회 음악에서 세속음악을 포함한 기악음악으로 그 관심 또한 옮겨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실내악의 형태는 르네상스와 바로크시대를 지나며 조금씩 바뀌다가 18세기 프란츠 조셉 하이든에 이르러 현대적 의미의 틀을 확립하게 된다. 이렇듯 음악은 한 천재의 영감에서만 흘러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회의 움직임이 때로는 위대한 인류의 문화적 유산을 탄생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강미라<첼리스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