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불안에서의 구원

2014-10-1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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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영(목사)

군에서 제대할 무렵, 권신찬 구원파가 대구 앞산 밑에서 시작되었다. 지인이었던 광신도 정 엄마라는 여자가 “구원 받았습니까? 몇 날 몇 시에 구원받았습니까?” 집요하게 물어왔을 때 구원에 구체적인 확신이 없던 나를 유인해 권 목사의 설교듣기를 간청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만원 준다면 몰라도 기껏 9원 얻으려고는 안가겠다”고 농담하며 구원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설교 중, 구원에 대한 설교가 95%이상 차지하는데 그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던 한 목사가 구원설교를 짜깁기 하느라 중언부언, 진땀을 흘리며 했던 설교가 기억난다. 변명이라면 그때 추궁하던 구원에 대한 식상함 때문이라고 합리화 시킬 수밖에 없다.


1990년 바아르 선언문에서 W.C.C.는 종교 다원주의를 표방하면서 “기독교 밖에도 구원은 있다‘고 공식 선언하자 개혁측에서 발끈하고 나섰다. 즉 W.C.C.의 구원관은 ‘하나님의 선교 차원의 수평적 사회구원‘이고, 개혁측은 ‘십자가 용서의 수직적 개인구원‘간의 흥미로운 집안싸움이다.

수직과 수평이 만나 십자가가 된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상식인데 또다시 이 두 형제가 ‘구원‘을 놓고 십자가를 수직수평으로 톱질하고 있다. 그건 꼭 직업목사가 구원을 팔다 밥 얻어먹는 것이나, 직업 실존주의 철학자가 ‘불안‘을 팔아 밥 먹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즉 ‘구원‘이란 개념이 얼마나 애매했으면 구원에 대한 확신의 잣대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의 심리를 잘 투영하는 것과도 같다. ‘구원’이란 단어가 기독교만의 전세 낸 단어가 아닌 것처럼, 불안한 현대인들이 그렇게도 목말라하는 이 ‘구원’의 뜻이 꼭 신학적인 의미 말고도 소설하는 사람들도 흔히 쓰는 ‘나의 구원을 위해 글을 쓴다’ 고백하지 않던가.

지금 지구촌은 ‘불안’이란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있다. 이 불안감을 이기려고 마약, 술, 담배, 총기난동, 자살 등을 하는 얼룩진 우울한 사회상이다. 1950년대 부흥강사 이성봉 목사는 ‘박 군의 심정’이란 책을 썼다. 박 군의 마음을 불안케 하는 12가지 짐승을 묘사한 것인데 우리도 가끔 짐승만도 못한 사람 봤다 하듯이, 박 군도 불안의 자식, 즉 미움, 시기, 욕심, 호전성, 거짓말 등의 포로였었지만 예수를 통해 불안에서 구원받고 행복한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내용이다.

바울이 없었더라면 과연 기독교가 존재했을까? 하는 지나친 의아심도 그의 구원의 진술 때문이다. 불안한 옥중에서도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느니...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고 한 한 노인의 무소유의 구원이다. 이와 같이 현실 구원 없이 사후 구원에만 목매는 설교는 마치 검은 양복에다 흰 천으로 짜깁기하는 설교와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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