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민족의 혼

2014-10-1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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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주필)

일제시대 조선인들이 일본의 착취와 수탈을 피해 이주한 북간도에서의 이야기다. 중국인 마적단에 의해 일본영사관 가족과 일본인 부녀자가 살해됐는데 일본은 이것이 조선인의 짓이라며 연해주 주둔 3개 사단을 출동시켜 조선인을 대량보복 학살했다.

사건 이후 한 마을 전체가 불타고 있는데 변씨라는 한 농부가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군은 태극기를 들고 있던 그의 오른 팔을 어깨에서부터 내리쳐 잘랐다. 오른 팔과 함께 태극기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변씨는 또 왼 팔로 태극기를 집어들고 다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군은 칼을 들어 다시 그의 왼쪽 어깨를 내리찍었다.


변씨는 또 한 차례 만세를 부르고는 붉은 선혈 위에 쓰러졌다.
그의 이런 불타는 애국정신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뜨거운 민족혼에서 나오는 것이다. 어느 국가나 사회든 백성을 탄압할 때는 우선 이런 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진시황이 460여명의 학자를 구덩이에 생매장 하고 책이란 책은 모두 불살라 버린 일명 ‘분서갱유’ 사건도 학자들에 대한 혼 말살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일이 한국에서도 일본에 의해 한민족의 혼이 말살당하는 수난사가 펼쳐졌다. 조선을 강제 점거한 일본은 먼저 민족의 혼이나 다름없는 한국말부터 없애버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조선의 학생들은 한국어는 물론, 수업도 모두 일본어로 받아야 했다. 한국말을 하면 ‘조셍고’라 하여 표를 서로 뺏고 빼앗기는 시합을 하게 했다. 그 결과 표를 많이 뺏은 아이는 상을 받고 표를 많이 빼앗기는 아이는 벌을 받곤 했다. 아이들은 상을 받기 위해 벼라 별 묘안을 다 짜내면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일제시대 우리말과 우리글이 말살되는 기가 막힌 광경이다.

한국이 지금 ‘영어 모시는 나라’로 전락해 한글이 큰 수난을 겪고 있다 한다. 한국사회 분위기가 영어라면 무조건 사족을 못쓰다 보니 오늘의 우리말을 지키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영어를 잘해야 대접받고 영어를 못하면 취업자체가 어려우며 영어를 쓰지 않고는 대화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오히려 미국에 이민온 한인들이 2세들에게 가정에서 한글학교에서 한국말을 가르치기에 혼신을 다 하고 있다. 심지어는 외국인조차 한국어 배우기에 한창인데 오히려 한국에서 영어를 하기 위해 난리라니 어이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나라의 존립과 낙관적인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나라의 존망은 그 나라의 말과 역사, 문화에 달려있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다. 민족의 혼이 뚜렷한 자존감과 바른 의식이 없는 민족의 말로는 너무나 자명하다.

조선 말기 민비는 속옷차림으로 일본군에 쫓기다 뜰아래 넘어뜨려진후 세 차례 가슴이 짓밟히며 칼에 거듭 찔려 벗긴 상태에서 기름이 뿌려져 불태워졌다. 또 순종은 한일병합 조약체결 위임장에 국새찍기를 일본측에 강요받았으나 흐느끼면서 이를 허락지 않고 침실로 들어가니 윤덕영이 몰래 어새를 찍어 이완용에게 건넸다. 민족의 혼이 실종돼 나라를 지켜낼 힘이 없는 국가의 망국적인 모습이다.


역사가 이럴 진대 한국인들이 서양문화에 휩쓸려 한국말과 글을 홀대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100여년 전 서구인에게 비친 한국은 예절 바르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였다. 그런 나라의 후예에게 지금 올바른 민족혼을 기대한다는 건 무리일까. 한국사회가 툭하면 서로 분열돼 다투고 향방을 몰라 우왕좌왕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한국이 경제대국의 반열에 올라섰다고는 하나 왜 의식이 이렇게 빈곤해졌는가. 한국어는 한민족의 혼이다. 이 혼이 실종된 토양에서는 더 이상 이순신, 안중근, 김구 같은 위인을 기대하기 어렵다.

중국의 학자 공런허(仁和)는 말한다. 모국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남의 나라를 멸하고 남의 조종(祖宗)을 짓밟아 버리려면 우선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 역사를 없애버려야 한다.” 한국인들이 얼마나 더 치욕을 당해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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