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는 것? 죽는 것?

2014-10-1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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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철 <은퇴목사>

한 사람이 고고의 소리를 지르면서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면서 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미래의 어느 시간의 정점(定點)을 향하여 그 시간의 길이를 달려가고 있는 것을 가리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50년 길이의 시간을 달려왔으면 50년을 살았다 하고 90년 시간의 거리를 달려왔으면 90년을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살아간다는 말이 맞는 말 일까?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정점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은 그만큼 살아야 할 시간이 짧아진다는 의미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어가고 있다는 말로도 표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나에게 주어진 한 순간, 한 순간이 그렇게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되어 진다.


교회를 섬길 때 병원에서 중병으로 삶의 소망이 끊어져 2개월 혹은 3개월 시한부 생을 이어가고 있는 교우들의 한스러운 말은 ‘왜 내가 내 이웃들에게 좋은 이웃과 친구로 살지 못했나’하며 후회하는 말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내 앞에 놓여진, 지금 나의 이 순간도 소중하고 아까운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살아간다는 말과 죽어간다는 말의 표현을 어떤 때 사용하면 좋을까?
내 삶 속에서 매 시간 내 생애에 큰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며 내 이웃과 세상에 사랑과 덕을 세우는 일에 승리하였으면 그 시간은 살아있기에 살아간다고 말하고, 내 생애의 시간이 어떤 의미와 가치 없이 무의미하거나 오히려 내 이웃에게 해로운 일이 된다면 그 시간은 죽은 시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살아가는 창조의 시간을 살려면 힘들고 자기희생이 요구되어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성경 마태복음 6:31, 33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였다.

우리가 사는 것은 약육강식 논리가 지배하는 경쟁사회가 아니요. 서로 돕고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의 부족을 채워주어 너와 내가 아닌 우리로서 살아 하나님의 의의 요구를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죽어가고 있는 것인가?
지금부터라도 후회 없는 나의 앞에 있는 시간을 내 생의 삶의 시간으로 남길 수 있으면 얼마나 복된 일이겠는가? 나는 지금 나의 앞에 있는 최후의 정점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나 삶의 시간이 되기를 소원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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