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환(哀歡)의 13년

2014-10-1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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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완<조은학교 교장>

미국 땅을 밟은 지 15년째다. 이민 온 모든 한인들이 그러하듯 나에게도 고생이 왜 없었겠는가? 만감(萬感)이 교차되는 지금 펜을 들었다. 유학 온 자녀들을 따라 60대를 지난 내가 발붙인 곳은 뉴저지 포트리였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땐 모든 것이 신기하다고 느꼈던 터라 가족이나 친지들을 따라 주변의 슈퍼마켓 상가뿐만 아니라 혼자 걸을 수 있는 어디든지 돌아 다녔기에 보통 신발이 닳은 게 아니었다. 아는 친구도 없이 이런 무료(無聊)함의 생활이 반년쯤 될 무렵 20분 거리의 근방에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알게 됐다. 바로 포트리 메인 스트릿에 있는 포트리 시니어센터(Richard Senior Center)였다.


1.5세 한국인 여성이 우리말은 서툴지만 잘 가르치기에 20여 명이 강좌시간엔 빠짐없이 출석했는데 6개월 쯤 지나 가을 학기를 맞을 무렵 이 영어 선생님은 나를 불러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기초반을 맡아 달라는 간청이었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영어를 잘 못하는 나였기에 그러하다.

수업시간에 내가 단지 문법을 조금 알면서 질문하고 때론 답을 하는 것을 보고 평가한 듯하다. 10여 일 동안 고민하다 ‘자신도 더 잘 배울 수 있다’는 말에 우선 맡아 본다고 답했더니 ‘Step by Step’ 책자 등 몇 권의 교재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것이 나의 역사를 바꿔놓을 줄이야!

집에 들어와 교재와 씨름하기 시작 한 달 여 만에 기초반 학생은 20명을 돌파해서 동력을 받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의 교분은 아직까지 여러 명과 이어지고 있다.
이러던 다음 해 2월 초순 내가 출석하던 교회의 선교관이 평일은 별로 사용하지 않기에 목사님께 시니어들을 위한 교육을 제안, 교회의 뒷받침 속에 홍보지를 만들어 한 친구와 걸어 다니면서 브로드 애비뉴 일대의 상가와 슈퍼마켓 등에 곱은 손을 불며 열심히 붙였다.

드디어 2003년 2월6일 개강 첫날 30여 명이 넘는 수강생들이 몰려 대 혼잡을 이룬 가운데 난 너무나 고무되어 교회 주보에 이 사실을 알리는 글을 올리기까지 했다. 이름은 내가 속한 구역의 ‘보람목장’ 그 이름을 따서 보람학교로 명명하였다. 교훈은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삶’으로...

영어와 음악, 컴퓨터 반까지 개설, 승승장구하여 포트리 시니어 센터와 보람학교를 오가면서 힘든 줄 모를 무렵 교회 사정에 의해 선교관이 문을 닫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난감한 처지에서 뉴저지한인회를 노크했다. 뉴저지한인회(윤용상 고문 김진국 회장)는 대 환영을 하며 우리를 맞아 주었기에 이곳에서 둥지를 틀고 개명한 이름이 오늘날의 ‘조은학교’다.

이후 점차 라인댄스, 서예 등 더 많은 과목을 늘리면서 자원 봉사하는 강사님들도 신이 났다. 과목마다 30~50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곤 했다. 이북의 같은 면소재지에 사는 동향인의 만남. 50여 년 전의 경상남도 한 초등학교 동창의 만남. 이외에도 인천여중, 대전 보문고등학교, 성균관 대학교 동기동창을 만나 얼싸안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고 흐뭇함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보람학교 창립을 위해 같이 추위를 무릅쓰고 나와 같이 다녔던 친구, 빙판에도 컴퓨터를 배우기 위해 학교에 나오다 갈비뼈를 다친 친구, 열심히 영어를 가르쳐 주시던 강사님을 잃는 슬픔을 맛봤다. 또 강의실을 잃어 전전긍긍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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