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용서’라는 말

2014-09-2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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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순 <수필가>

‘용서’라는 말이 세상에 물결처럼 흐르는 시간, 선(善)의 향기가 피어올라 모든 악(惡)을 덮어버리는 것 같았다.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이 보였다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용서’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영화 ‘밀양’이 떠올랐다. 아들이 죽었어도, 범인을 만났을 때도,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보낼 때도 쓰러지지 않았던 여주인공 신애가 쓰러졌다. “하나님께 용서받아 평안합니다.”는 범인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피해 당사자인 자신을 소외시키고 누가 이 사람을 용서했단 말인가?”

가해자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한 회개를 했다. 하지만 피해자인 신애와의 관계회복을 위한 회개를 시도한 적이 없다. 범인이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자비와 은총을 입었다면, 반드시 신애에게 용서를 구하고 자신의 죄를 참회해야 했는데도 말이다. 혼자서 뉘우치고 후회하는 데서 멈추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변화된 행동을 보여야 한다. 또한 회개했다고 해서 책임이 면피(免避)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도둑이 회개했다고 해서 그동안 훔친 물건들을 모두 가져도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렇게 주어지는 용서가 진정으로 회개하는 이가 받아야 될 선물이 아닐까.
이창동 감독은 영화 ‘밀양’을 만들면서 광주를 떠올렸다고 했다. 1980년 광주에서 아들과 딸을 잃고, 남편과 아내를 잃고, 세 살 박이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잃었던 그 참혹했던 만행에 희생된 피해자들. 가해자들은 국가로부터 용서받았다고 잘사는데 상처 입은 자들은 여전히 고통 중에 있는 것이다. 일본은 우리나라 여자들을 붙잡아다 성노예를 만들고도 잘못을 시인하기는커녕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며 으르렁거린다. 힘이 있다고 해서 인간의 생명을 빼앗고,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짓밟는다면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영화 속 신애는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자신의 인생을 상처투성이로 만든 가해자에게 분노를 드러낸 적이 없다. 하나님께만 화를 낸다. 왜 그럴까? 그녀는 이기적인 범인의 회개에 분노해야 한다. 우리는 진정한 참회가 없는 일본에게 분노해야 한다. 반성할 줄 모으는 원흉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분노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인간의 본성 안에 깃든 선(善)의 가능성을 끌어낼 수는 없을까. ‘용서’라는 말로 용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이 지구상에 같이 살고 있는 한 포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예수님께서는 용서야말로 화해로 이르게 하는 문임을 믿으라고 우리에게 요청하신다.”라는 메시지를 주고 가셨다. 참으로 아름다운 말씀이다. 죽은 것들을 깨어나게 하는 생명의 힘, 화해의 가능성이 ‘용서’라는 말속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보물을 말로 쉽게 캐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회개, 용서, 화해가 한 몸의 생명체로 살아나 사람 사는 세상, 값진 내일을 위한 평화의 꽃이 만발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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