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단심봉이 걸어간다

2014-09-2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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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교육가>

“그러니까 그 날은 공부를 안 하네요.” “합니다” “행진을 한다고 하셨잖아요” “거기서 합니다.” 그 분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매번 되풀이되는 질문이다. 이는 공부에 대한 개념의 차이에서 온다. ‘공부’란 도대체 무엇인가.

필자는 맨하탄의 거리를 걸을 때, 그 어느 날 보도가 아닌, 차도 한복판을 큰 걸음으로, 두 팔을 휘저으며 걷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할 기회가 생겼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것은 연례 코리안 퍼레이드가 있는 바로 그날이다. 여기에 참가하여 각자가 느끼는 그 상쾌함을 어린이들에게 느끼게 하고 싶다. 첫 번 시작부터 현재까지 거의 빠지지 않고 이 행사에 참가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공부’란 과연 무엇인가?


유치반을 참관한 학부모의 말이다. 공부는 하지 않고 놀기만 하니, 언제 무엇을 배우는 것일까? 교실을 둘러본 학부모의 말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학생끼리 서로 의견만 주고받으니 언제 공부를 하는지?” 사실은 그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것이 책보다 더 귀중한 것인데, 별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은 무슨 이유일까. 여기에 답을 하는 것은 학교의 커리큘럼이다. 각종 영양분이 골고루 섞이도록 밥상을 차리는 부모의 정성과, 지식이 골고루 섞이도록 연구하는 학교의 노력은 일맥상통한다.

“꽃차를 타면 좋을 걸, 그 먼 거리를 걷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이것도 지나친 염려이다. 줄을 서서 걷게 하는 행렬은 미리 연습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각자가 단심봉에 매달린 긴 헝겊 끈을 잡고 걸으면 연습이 필요 없다. 단심봉(丹心棒)의 뜻은 정성스러운 마음이 담긴 막대기다. 여럿이 여기에 매달린 긴 천을 손에 잡고 함께 걸으면서 느끼는 일체감은 귀중한 것이다. 우리는 무엇에 마음을 모으려고 하나?

행진에 참가한 학생들의 볼이 빨갛다. 연도의 인파가 손뼉을 치는 사이로 걸어가는 기쁨은 다리가 아픔을 잊게 한다. 그들은 그것을 이야기한다. 그림으로 그린다, 글로 쓴다, 오랫동안 마음에 남긴다. 이것이 ‘거기서 공부한다’는 설명이다.

‘공부’는 온갖 것을 가르친다. 가정생활, 학교생활, 사회생활의 모든 것이 이에 속한다. 학교에서는 이에 바탕이 되는 기술, 지식을 주고 효과적으로 연습시킨다. 학생들은 기초지식의 내용을 이해하고, 기초기술을 연마한다. 가정, 학교, 사회가 자녀나 학생에게 쏟는 정성은 다음 세대를 위한 노력이고 투자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교육에 대한 바람은 더 멀고 넓은 다음 세대를 위한 정성이다. 당장 그 효과가 나지 않는다고 조마조마하며 마음을 졸일 필요가 없다. 느긋하게 그들을 지켜볼 일이다. 그러다가 방향이 위태로울 때 그것을 조정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다면 충분한 교육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줄 수는 없어도, 그것들을 받아들여서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주려는 것이다.

거기에 선행되는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을 우선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계 미국인, 이 드넓은 미국은 내가 일할 수 있는 무대, 나의 생각과 재능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라는 믿음이 싹튼다면 기본자세를 이룬 것이다. 그들을 돕는다는 것은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도록 격려하는 일이다.

“내 친구가 말해요. 너희는 좋겠다. 퍼레이드가 있어서” “그럼, 네 생각은?” “나는 어떤 나라든지 제각기 퍼레이드를 하는 줄 알았어요” 이것도 재미있는 대회이다. 그는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내 친구를 데리고 와도 좋아요?” “환영합니다” 학생들과의 대화가 계속된다. “퍼레이드에 입으라고 새 한복을 한국에서 보내주셨어요” “좋겠네” 이렇게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싣고 단심봉이 행진을 한다. 양편의 행인들이 손뼉을 친다. 여기에 참가한 학생들이 20년 후에 말한다. “또 한 번 참가하고 싶다. 내 아이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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