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초인의 길

2014-09-1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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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순(수필가)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스스로의 한계에 도전하고 자신을 초월하여 자신을 끌어올리는 사람을 초인’이라고 했다. 영화 ‘명량’을 보면서 “성웅 이순신 장군은 초인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극기, 백성을 지키려는 신념, 목숨까지 내어놓고 싸우는 강한 의지가 그랬다.

더욱이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전쟁터에서 시조와 일기를 썼다는 부분이 내게는 감동스럽기만 하다. 만약 그가 문인이었다면 대단한 문장가가 되지 않았을까. 그의 빼어난 지략은 방대하고 꾸준한 독서와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기록의 산물이었다고 한다. ‘임진일기’ ‘병신일기’ ‘정유 일기’는 ‘난중일기’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귀한 사료(史料)며 보물이다. 장군의 일기 속에는 인간적인 고뇌와 품격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어 가깝게 느껴진다.


5월 6일 <병신> 맑다. (전략)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설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은 어째서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 하는고! 왜 어서 죽지 않는지. (후략) 일기의 백미 중에 하나로 꼽히는, 명량 해전을 마치고 쓴 일기속의 참담한 심정이 느껴져 슬프다.

9월 16일 <갑진> 맑다. (전략) 나는 배위에 서서 몸소 안위를 불러 이르되,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너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고 하니, 안위가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중략) 이것은 참으로 천행이다.

끝에 맺어진 “천행”이라는 한 마디로 한숨을 돌리며 일기를 썼을 장군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저리다. 12척의 배로 수백 척의 왜군과 싸워야 하는 전투를 앞둔, 회오리치는 풍랑을 바위위에서 내려다보던 장군의 암담함은 어떠했을까. 그 고독을 견디며 지었을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과 한산도가(閑山島歌)’란 시조에는 그의 우국충정이 가득 담겨 있다. 장군 사후 400년인 지금, 나는 그의 글속에서 초인의 빛과 정신을 받들며 벅찬 희열을 느낀다. 피로 쓴 글들만이 가치가 있는 거라면 장군이 쓰신 글들은 초인의 의지로 새긴 피의 업적이리라.

하지만 그는 원래 초인이 아니었고, 문장가도 아니었다. ‘난중일기’로 발견되는 이순신 장군은 자기의 부족한 점들을 끊임없이 극복해 간 평범한 존재였다. 이 성실함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존경케 하는 초인의 모습이 아니던가.

‘스스로의 의지로 난관을 극복하고 최고의 가치를 창조하면 누구나 초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바다건너 아름다운 섬을 바라보듯 초인의 발자취를 경외하는 우리에게 장군의 넋이 말한다. “너 스스로 초인이 되라!” 장군은 부하들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었듯, 우리에게 험난하고 고독한 길을 두려움 없이 가라 하신다. 나는 그 초인이 걷던 길목에 서 본다. 그 길 위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새벽어둠속에서 힘차게 솟아오르는 아침 해 같은 사람, 미래의 초인이 다가오는 발자국소리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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