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우.미.양.가

2014-08-0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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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신 <목사>

박스에 담겨서 부모님 댁 지하실에 보관되어 있던 서류와 문서들을 정리할 기회가 있었다. 먼지에 뒤덮인 대학시절 서류에서부터 수 십 년 전 초등학교 졸업앨범까지 하나씩 살펴보며 추억에 젖어 들었다. 초등학교 앨범 속에 가장 친했던 친구의 사진을 보며 “아! 이런 친구가 있었지. 지금은 어디서 뭘 할까?” 궁금해 하기도 했고 고등학교 시험지를 보면서 “그때는 이 문제를 쉽게 풀었는데 지금은 이게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네”하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런데 우연히 그 많은 서류들 가운데 이민을 오면서 담임선생님께서 복사해 주신 생활 기록부를 찾게 되었다. 이미 기억 속에 깊이 잊어 버렸던 선생님들의 성함과 짧지만 그 분들의 평가가 적혀 있었다. 그뿐 아니라 각 과목의 성적도 굵은 잉크 글씨로 적혀 있었다. 혹자의 말마따나 우수수...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화려한 성적표였는지, 아니면 양양양... 양떼만 보이는 광활한 방목장이었는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양가... 양씨 집안 아들이었는지는 밝히지 않겠지만 예전의 성적들을 보며 그때는 그러했지 기억하며 잠시나마 어릴 적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미국에서 자라는 자녀들의 성적표를 보면 ABCD 혹은 F라고 해서 레터 그레이드를 사용하고 있다. A는 90점 이상, B는 80점, F는 59점 이하라는 통상적인 점수와 대비한 성적이다. 그에 비해 우리가 다니던 학교는 수, 우, 미, 양, 가를 사용했다. 요즈음에는 미국과 같이 ABC를 사용한다고 들었는데 내가 익숙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나는 미국식 등급보다는 한국식 등급이 더 친숙하고 정겹다. 레터 그레이드는 성적에 대비해서 앞에서부터 뒤로까지 직선적으로 매긴 점수대용에 불과하지만, 이 수, 우, 미, 양, 가가 실은 잘했다, 못했다의 의미만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생님들은 이런 글자들을 사용하셔서 학생들의 등급만을 매긴 것이 아니라 사랑의 의미로 한자, 한자를 사용하셨다.


수(秀)라는 글자는 ‘빼어날 수’로 매우 우수하다는 뜻이다. 우(優)는 ‘넉넉할 우’로 도탑다, 잘한다는 뜻이며, 미(美)는 ‘아름다울 미’로 역시 좋다는 뜻을 갖고 있다. 잘했다는 말인 것이다. 양(良)은 ‘어질 양’으로 ‘좋다’, ‘어질다’, ‘뛰어나다’의 뜻이 있어, 말 그대로 ‘good’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수, 우, 미, 양이 나름대로 좋은 의미로 잘한다는 뜻이라면 ‘가’만은 못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놀랍게도 가(可)는 ‘옳을 가’를 쓴다. 못한다가 아니라 ‘괜찮다’ 가능성이 있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수, 우, 미, 양, 가... 어느 하나도 “넌 못하는 아이야. 포기해야 돼. 가능성이 없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등급은 없는 것이다. 점수는 상위 얼마, 하위 얼마를 나누어 잘했다, 못했다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말지만, 우리 선생님들은 성적표를 작성하면서도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고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시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수 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때 그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스승의 은혜가 얼마나 높은지, 얼마나 귀한지, 제자들을 향한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여전히 우리 마음에 감동으로 다가 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사랑이란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조금 뛰어날 수도, 조금 못할 수도 있지만 다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으로 보살피고 격려하고 세워가는 것이 사랑이다. 그런데 어느새 우리는 가능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따지고 재어서 소수정예는 대접하지만 그 외는 도태시켜 나가고 있다. 모두 다 안고 가기는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제한된 자원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때 극대의 효과를 가지고 온다는 논리로 상위 몇%를 따지다 보니 너도 나도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남들을 짓밟고 올라서려고 하는 살벌한 사회가 되고 말았다. 커닝을 해서라도 A를 받아야 하고, 친구를 모함해서라도 내가 앞서야 하는 사회는 무서운 경쟁만 있는 메마른 곳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생존의 논리가 심지어는 유치원에서도 가리고 나누는 기준이 되고 말았다고 하니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오늘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마지막 한 제자까지 가하다고, 괜찮다고 감싸 주시던 선생님의 마음이 아닐까. 어쩌면 그 마음은 우리를 조건 없이, 구분 없이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아닐까. 하나님의 눈에는 모두가, 죄인이든 의인이든 사랑스러운 것이고 다 “빼어나고, 넉넉하고, 아름답고, 어질고, 괜찮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저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성적을 매겨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작지만 가능성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오늘 우리들도 어떠한 판단과 기준에 맞추어 수, 우, 미, 양, 가를 따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던 것처럼 서로 용납하고 받아들이면 좋겠다. 그러면 각박한 이민사회도 조금은 넉넉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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