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업데이트 뉴 버전

2014-07-30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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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면서

▶ 강신용

빨간 유니폼에 테니스장이 환해진다. 젊은 남자여서인지 강렬한 원색이 건장한 체격에 잘 어울린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마침 세 사람이 가볍게 주거니 받거니 몸을 풀고 있을 때 숫자가 맞으니 청년이 반갑다. 요즘은 아들 같은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조심스럽다. 유유상종이라고 동호인끼리 모여 잘 치던 못 치던 다 함께 뛰다보면 어느덧 땀 냄새에 마음까지 젊어진다.

젊은 패기에 힘이 잔뜩 실렸다. 세 사람은 적어도 두세 번은 매주 코트에 나온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구력이 십여년 되다보면 실수가 줄어든다. 힘이야 매 순간마다 조절할 수 있다지만 구력이야 공친 만큼 세월이 지나야 쌓이는 것이다. 네 명이 치는 복식경기는 서로 간의 몸짓에 따라 전후좌우로 뛰고 빠지고 호흡이 척척 맞아야 재미가 있다. 힘 있고 돈 있다고 다되는 것도 아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오랫동안 숙성된 경험이 젊은이의 패기에 맞서 코트를 달군다.

멋진 스윙 폼은 투자에 비례한다. 주말마다 명품 유니폼에 골프나 테니스를 즐길 수 있다면 그들은 탑 5%에 속하는 부류일 것이다. 한때는 이곳 골프장에 한인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던 시절이 있었다. 어깨 너머로 배운 독학파 골퍼들은 달라도 어딘가 다르다. 제아무리 유명한 골프채라도 다루기 나름이다. 너무나 개성적인 폼으로 스윙을 한다. 살만해졌다. 배우고 알고 하고 싶은 것들이 지천에 널렸다. 투자는 적게, 실적은 많게, 만사가 그렇게 호락호락 게 아니다.


문학 강좌에 학생들이 넘쳐난다. 교실에는 산전수전 다 겪은 정정한 노년의 예비문인들로 가득 찼다. 내 자식 잘 되라고 밤낮으로 일밖에 모르고 살아 왔다. 오랜 이국생활을 이겨온 삶의 훈장이 이목구비에 줄줄이 서려 있다. 한 많고 설움 많은 이민의 아픔이 가슴을 타고 원고지를 가득히 메울 것이다. 국제화의 깃발아래 조국이 해외동포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있다. 아프면 고쳐주고 마음이 허하면 가수들을 데려다 공연도 해준다. 자신을 풀어내고 삶을 기록하는 글쓰기 무료 강좌는 그래서 인기가 좋은가 보다.

은근과 끈기로 줄기차게 버틴다. 동방예의지국에 사는 한민족의 특성은 은근과 끈기라고 한다. 백년 전 버전인가? 현대판 버전은 아닌 것 같다. 뉴 버전은 ‘빨리빨리’로 바뀌었다. 앞으로 앞으로 달리자, 언제까지 낭떠러지기 앞까지. 시큼한 냄새가 날 때까지 고집불통으로 버티고 본다. 지구의 모든 것은 나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는다. 배금주의가 은근히 뿌리 깊게 내린지 오래다. 다이아몬드의 크기와 자선하는 마음이 비례하지는 않는다.

발품이 입품보다 아름답다. 첫 줄 맨 앞자리에 80대 박 할머니가 앉아계신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왕만두를 하나씩 학생들에게 나눠주신다. 다음 날은 전날처럼 떡 봉지를 손수 만들어 오셨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 보따리 찾는다”고 감사는커녕 입을 삐쭉거린다. 지갑은 집에 두고 따발총 같은 입담에 상처 입은 영혼들이 나성구에 가득하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란다. 하다못해 지갑이 약하면 발품이라도 팔아야 성공 버전으로 바꿀 수 있다.

변해야 산다. 쉰 세대 교수가 급변의 시대를 들추어 설명한다. 도도한 변화의 물줄기가 글로 영상으로 때로는 노래로 현실을 보여준다. 혹시 눈감고 딴청을 부리지나 않는지 반성해 본다. 젊은 영혼과 통하지 않는다. 생각의 버전이 다르다. 새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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