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의리를 잊지 말자

2014-07-2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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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6.25참전유공자)

내일은 61년 전 3년간의 비참한 한국전쟁에서 휴전이 성립된 날이다. 북한의 불법남침이 발생하자 재빨리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 구출을 위해 유엔군중 제일 먼저 참전시켜 한국전 참전병력 중 미 육군은 최고 30만 명이 참전, 한국전 참전 전체병력의 40%로 50%의 한국군의 병력과 맞먹는 병력이 투입됐다.

잔여병력 10%는 유엔참전국들로서 전투에 참여했으며 전투 기간 중에 미군 전사자들은 모두 54,000여명, 부상자 10만여 명이었고, 한국전에 참가한 미국장성의 아들은 모두 142명, 그 중 35명이 전사했다.


당시 미8군 사령관 워커중장은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전선에서 후퇴하면서 특히 미24사단은 후퇴작전에 큰 성과를 이루었다. 이 작전에서 특히 공이 많았던 사단의 중대장이었던 워커장군의 아들은 미국정부가 수여한 은성무공훈장 등을 직접 달아주기 위해 1951년 12월23일 크리스마스 전전날에 의정부와 문산 간의 도로에서 후퇴중인 한국군 트럭에 부딪쳐 현장에서 사망했다. 당시 이승만대통령은 트럭운전병과 지프차 운전병에게 사형토록 하려했으나 미군 참모들의 적극만류로 사형을 면하게 해주고 대신 가벼운 징역형으로 감형 받도록 해줬다.

또 전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의 아들 지미 밴플리트 2세인 공군중위는 아버지가 사령관으로 있는 한국전에 참전하여 1952년 4월2일에 압록강 남쪽 순천지역을 폭격중 실종됐다. 또 미제24사단장이었던 딘소장은 적탱크에 로켓포를 직접 발사해 적탱크를 폭파시킨 후 부상당한 사병이 목마르다고 해서 직접 물을 뜨러 개천을 찾아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길을 잃고 헤매다가 한국인 농부의 밀고로 북한군에 붙잡혀 3년 동안 포로생활을 해야 했다.

그 후 퇴역후 자기를 밀고한 농부가 5년형을 받고 복역 중인 사실을 알고 무식한 농민이 살기 위해 5달러를 받고 밀고한 행동에 대해 한국정부에 감형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해 출옥시킨 사실은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일들이다.

한국전 중에서도 고위공직자들이나 기업인들의 자식들은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군복무 면죄를 받았던 사실들은 너무나 부끄럽다. 미국은 휴전 후에는 복구사업에 문경세멘트 공장건설, 인천유리공장, 비료공장 등을 무상 지원하여 건설해주어 급속도로 전후복구로 오늘날의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지금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고 있게 된 것에 감사한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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