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리빙 윌(Living will/ 사망선택 유언)

2014-07-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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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영(병원 수퍼바이저)

병원에서 일을 하니 아픈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월이 지나다보니 돌팔이 의사 수준이라고 주위에서 놀리지만 주사바늘 찌르는 것도 바로 보지 못하는 겁쟁이다. 직접 만나는 일보다 더 많은 것은 전화 상담이기도 하다. 전화 거는 사람이야 얼마나 답답하면 이런 전화를 할 것인가 생각하지만 황당한 문의도 적지 않다.

병원에서 받는 청구서 문의는 당연하다하겠지만 때로는 본인의 담당의사가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아는가, 나이는 몇이나 됐는가, 병원에서 사용하는 엑스레이 기계의 브랜드가 무언가……. 시리즈 넘버를 알 수 없겠는가. 나는 의료기기에도 명품 브랜드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명품이라기보다는 고물이 아니고 최첨단 의료기일 것이라는 답을 해주게 된다.


병원이라는 곳이 물론 아픈 사람이 와서 적절한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곳이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가는 경우도 있게 마련이다. 병원에 들어오면 수많은 서류에 사인을 해야 하는데 우리 한국인들이 거의 한결같이 거부감을 느끼는 서류가 ‘리빙 윌(Living Will/ 사망선택 유언)’ 이다.

. 거부감뿐만 아니고 기절초풍을 한다. “나는 간단한 수술인데 죽을 수도 있는가요?” 하고 놀라 서명을 거부한다. 간단한 수술은 물론 거의 소생의 가망이 없는 환자들이나 그 가족도 마찬가지다. 이 ‘리빙 윌’은 ‘Advance Directive(사전지시)’로 본인이 이에 대하여 알고 있는가. 설명듣기를 원하는 가 등에 대한 질의와 안내서일 뿐이다
이따금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로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튜브로 음식물을 공급받는 환자들의 심장이 힘차게 뛰는 것을 보며 담당의사가 조심스럽게 산소 호흡기 제거를 타진하면 오케이 하는 가족은 거의 없다.
한번은 병원 복도에서 한국말로 날카롭게 소리치는 여자를 보았다. 달려가 보니 내용인즉 “의사가 돼가지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려낼 생각은 안하고 뭐라고? 산소 호흡기를 떼면 어떻겠냐고? 그래 당신이 의사냐?”
이 여자의 90넘은 어머니는 암이 다 퍼진 상태로 의식이 없는 상태로 열흘이 넘게 온몸에 튜브를 통해 진통제와 산소 공급 및 영양분이 투여되고 있다. 허리께에는 조금씩 욕창이 생기고 있어 의식 불명상태에서도 이따금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리곤 했다.
아들 나이또래의 젊은 의사 닥터 최는 그 앞에 죄인처럼 서서 쩔쩔매고 있는데 아차 하는 듯 한 얼굴이었다. 그런 상황은 상상도 못했을 터이다.

병원에는 이런 환자들도 있고 또 이런 일도 일어나기 때문에 의료진과 가족들이 함께 의견을 나누며 결정하게 될 때가 있다. 한국인의 정서나 관습은 남편의 산소호흡기 제거를 아내가 할 수 없는 듯하다. 반드시 아들이 결정해야하며 아들이 없으면 남편의 남자 형제 등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것 같다. 그러다보면 결정하는데 며칠씩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환자는 고통 속에서 조금씩 무너져가고 가족들은 지친다.

나는 환자가 조금이라도 제 정신이 있다면 튜브 뽑고 그냥 편안히 가게 해달라고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생사에는 기적이라는 것이 있어 혹시나 하는 바람이 있게 마련이지만 꼭 가야할 그 길을 기적을 바래며 연장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 지갑 속에는 ‘Living Will Registry(사망 선택 유언)’ 카드가 들어있다. 건강관리를 위한 사전지시로(Advance Directive) 내 서명이 들어간 등록카드에는 ‘Organ donor’ 스티커가 붙어있다.이런 결정을 내려야할 경우가 내게 닥친다면 공연히 고통스럽게 시간을 끌면서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에너지 낭비를 시키고 싶지 않다. 그리고 필요한 사람에게 마땅한 장기를 떼어주는데 가족이 망설이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한번 왔다 가는 여정인데 그렇게라도 남은 가족에게 한 재산 유산은 못 남겨줄망정 마음의 짐이라도 지우지 않게 해줘야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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