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환>
미국은 독립전쟁 중 ‘미국을 사랑 했다기보다는 영국을 미워하던’ 나라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불란서가 특별히 많은 도움을 주었다. 첫 2년간의 전쟁에 쓰인 탄약은 거의 다 불란서에서 보내주었다고 한다.
외국인들로서 미국의 독립에 헌신한 분들이 많은데 이들 대부분은 물질적인 이득이나 사회적 영달을 위해서 참가한 것이 아니고 미국이라는 새나라가 지향 한다고 생각되는 ideal을 위해서 몸을 던진 것이다. 월급은커녕 군복이나 식량도 제대로 공급해주지 못하는 새 나라를 위해서 전사하고 부상을 당했던 것이다.
Thomas Paine은 영국 사람으로서 미국독립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미국의 독립투쟁에 불꽃을 튀긴 사람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한일합방 전후에 조선독립을 용감하게 격려해준 일본인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하였다. 영국의 한 Quaker 교도의 아들로 태어난 Thomas Paine 은 미국에 올 때까지 영국에서는 별 빛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다. Benjamin Franklin 의 권고로 필라델피아에 온 Paine은 미국의 식민지 상항을 보고 미국이 영국의 압정에서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1775년 76년 사이에 쓴 47페이지짜리 단행본 ‘Common Sense’ 에서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책은 나오자마자 10만부가 팔리면서 미 전 국민들에게 독립심과 애국심이 일어나도록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칼보다 붓의 힘이 더 세다‘는 것을 증명해준 사람이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이 선포되도록 큰 영향을 미친 그는 불란서혁명에도 많은 저술로서 영향을 미쳤다. 죽을 때까지 많은 인권과 자유에 대한 저술을 내고 미국에서 사망했다.
미국군은 총사령관인 Washington장군만 육군중장이었고 기타의 장군들은 전부 소장이하였다고 한다. 특히 불란서 장교들 87명이 Continental Army의 육군 장교로, 네 명은 Continental Navy 의 해군장교로 전투에 참가했었다. 미군들 중에는 불란서군인출신 장교들의 오만한 태도에 불평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불란서 군인출신 장교들 중에는 받은 미군계급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며 계급수여의 기준이 다소 모호했던지 불란서군 대위였던 La Fayette가 미군소장에 임명되자 불란서출신 장교들 간에 불평이 많았다고 한다.
외국인으로서 독립 전쟁 중 미국의 장군으로 활동한 몇 분을 적어본다.
DeKalb 장군은 독일출생의 불란서군인으로 미국의 독립전쟁에 육군소장으로
참전했다. 그는 미국이 패배한 South Carolina 의 Camden전투에서 타고 있던 말이 총격을 받아 낙마한 후 영국군들의 총검에 찔렸고 영국군 사령관 Cornwallis 장군의 감독아래 수술을 받았으나 “정당한 권리를 보호하다가 군인답게 영광스럽게 죽는다”고 얘기한 후 그 다음날 사망하였다. 미국 전역에 그의 기념 조각 등이 있으며 뉴욕시 브루클린에는 DeKalb Avenue 가 있다.
Lafayette장군은 불란서 귀족으로 미국독립과 불란서혁명에 관계했던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낸 사람이다. 나이 20세로 미국 육군소장에 임명되어 Washington 장군의 오른팔처럼 미국독립전쟁에서 활약했으며 그의 탁월한 전략 때문에 Washington 장군의 생명을 보존했다고 한다.
펜실베니아의 Valley Forge에서 미국군을 훈련시킨 그는 로드 아일랜드 등 여러 곳의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펜실베니아 주 Brandywine 전투에서 부상을 당했다. 그는 불란서의 미국독립전쟁 지원을 위한 중재역할을 해왔다. 미국 독립 후 1824년에 미국 Monroe 대통령의 국빈초청을 받아 당시의 미국 24개 주를 다 시찰한 그는 미국과 미국헌법을 아주 사랑하였으며 Paris에 있는 그의 묘소는 보스턴에 있는 Bunker Hill 의 흙을 가져다 덮었다고 한다. 미국 각지와 도시들에 그의 이름을 딴 시가지들과 동상들이 있다. 미국 국회는 2002년도에 그에게 미국의 명예시민권을 주었다.
Von Steuben 장군은 Prussia의 남작으로써 Washington 장군의 휘하에서 미군의 기본훈련교본을 만들었고 제복도 작성하였으며 군대 영내의 각종 건물들의 위치와 용도 등도 설계하였다. 미국의 여러 주와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시가지들이 있고 뉴욕시에서는 매년 9월에 독일계통 사람들을 중심으로 ‘Von Steuben Day‘ 기념행사도 한다.
Pulaski 장군은 폴란드의 백작으로 Poland에 침입한 외세들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사람인데 벤자민 프랭클린의 추천으로 Washington 장군 휘하의 미국군에 참전하게 된다. 그는 Brandywine 전투에서 미국군에 임관이 되기도 전에 Washington 장군의 생명을 보호해 주었고 영어를 전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육군 준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미국의 기병대를 전투부대로 개량하고 창설한 사람이다. 북부의 여러 전투에서 무공을 세운 Pulaski 장군은 미군이 영국군에게 패배한 조지아 주의 Savannah 전투에서 34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그는 미국국회가 미국 명예시민권을 추증한 일곱 사람 중의 한명이며 미국의 여러 도시에 그의 동상 이 있고 그의 이름을 딴 시가명도 있다. 뉴저지주 저시시티에는 Pulaski Bridge가 있다.
Kosciuszko (코스키아우스코) 장군은 폴란드의 외세저항 전쟁에서 큰 전공을 세운 사람이다. 그는 Poland Army Engineer로서 1776년에 미국 독립군에 대령으로 참전한다. 폴란드에서는 가장 존경받는 애국자이며 영웅이었다. 그는 미국 북부 남부의 여러 전장에서 전략적인 설계와 축성 등으로 독립군이 이기도록 했으며 사라토가 전투에서 미군이 승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여러 곳에 진지 축성을 하였는데 웨스트포인트 진지 축성도 그가 하였다.
그는 7년간의 미국군 복무 중 전혀 월급을 받지 못하였으나 미국국회는 1783년에 그를 준장으로 진급시키고 1784년 1월1일에 지불할 저축증서 1만2,280달러를 주었으며 미국에서 살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땅 500에이커를 주었다. 그는 1798년에 쓴 유서에 자신의 미국에 있는 재산을 흑인들의 교육과 해방을 위해서 써달라고 하였다는데 그 유서가 제대로 집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817년에 71세로 스위스에서 사망하였다. 뉴욕시에 있는 BQE(Brooklyn Queens Expressway)에는 퀸즈와 브루클린을 연결하는 Kosciuszko Bridge 가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