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언론이 무서운 나라

2014-07-0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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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주필)

인도의 정치적인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국가가 멸망할 때 나타나는 징조가 있다고 설파했다. 그가 일갈한 나라가 망할 때 나타나는 사회악 7가지는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富),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교육, 도덕 없는 상업,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신앙 이다.

이 중에서 ‘원칙 없는 정치’가 제일 첫 번째로 회자되었다고 한다. 언론인으로서 간디의 이 7가지 징조 중에 굳이 현대판 징조를 하나 더 추가한다면 ‘의식 없는 언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요즘 해보게 된다.


언론은 민심을 반영하고 민중을 일깨우는 역할도 있지만, 일부의 사실만이 아닌 모든 사실을 모니터링 하여 가감 없는 진실을 밝히는 본연의 역할이 있다. 그 어떤 권력이라도 과도한 횡포를 견제 할 수 있어야만 살아있는 언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교과서에서 우리는 그렇게 배워왔다.
언론이, 더 정확하게는 언론 종사자들이 영롱하고 먼지 없는 거울처럼 깨어있는 의식을 유지한다면 언론을 접하는 독자들은 각자 자기의 맡은 바 자리를 지키면서도 사회가 돌아가는 현상들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심 없는 언론이라면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속 시원하게 드러내어 정치적인 이해득실을 떠나 독자들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 언론의 현실은 어떤가? 영혼 없고 자기성찰 없는 모습은 때 묻고 깨진 유리조각 거울 같지 않을까. ‘정론직필(正論直筆)’ 이라고 했던가. 목숨 걸고 바른 말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펜들이 모인 언론이라면 독자들이 그 앞에 고개 숙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얼마 전 한국에서는 언론사 주필이 총리후보가 되면서 한편의 드라마 같은 일이 펼쳐졌었다. 율사들과 정치인들이 거의 차지해 왔던 내각 총책임자 재상의 자리에 글쟁이가 오른 일도 없었기 때문에 더 난리법석이었을까? 개인적으로도 사실 총리자리에 언론인출신은 적합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단 지명을 했으면 법 절차에 따라 인사청문회를 통해 자격 여부가 판별됐어야 옳을 일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후보는 여론과 언론이 가하는 질책에 못 이겨 결국 본의 아닌 ‘자진사퇴’를 결정하고 물러났다. 이런 분위기는 박근혜 대통령의 선친인 박정희 대통령 때와는 정반대다.

박정희는 1969년 10월 10일 연설에서 “내가 만일 야당의 반대에 굴복하여 ‘물에 물탄 듯’ 소신 없는 일만 해 왔더라면 나를 가리켜 독재자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내 소신껏 굽히지 않고 일해 온 나의 태도를 가리켜 그들은 독재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당이 나를 아무리 독재자라고 비난하든, 나는 이 소신과 태도를 고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앞으로 누가 대통령이 되든 오늘날 우리 야당과 같은 ‘반대를 위한 반대’의 고질이 고쳐지지 않는 한 야당으로부터 오히려 독재자라고 불리는 대통령이 진짜 국민을 위한 대통령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직업 언론인이 총리지명이 되기는 흔치 않은 일이다. 한국 언론은 총리가 극우이네, 친일이네, 극단적인 성향의 근본주의 기독교인이네, 라고 주홍글씨를 남발하면서 정식 청문회전에 이미 여론재판을 해버렸다. 무책임한 언론은 한나라의 ‘책임 총리’를 간택하는 총리 인선 이슈를 한낱 반장선거, 동네 통반장 선거로 전락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국정을 전 세계적인 코미디거리로 만들고 세계인들이 한국인들을 본인들 스스로가 어리석은 국민들로 여기도록 만들어 버리지는 않았는지... 언론이 본연의 자유를 스스로 속박한 것 같아 보여 마음 씁쓸하다.

이미 지나간 얘기를 거론하는 것은 한국은 언론의, 언론에 의한, 언론을 위한 나라처럼 보여 언론의 자유가 상징인 미국보다 더 언론이 무서운 나라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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