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상생(相生)의 철학

2014-06-2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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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 (아동문학가/ 목사)

요즘 정치계나 경제계에서 외치는 것이 상생의 정치, 상생의 경제이다. 기쁨도 나누어야 기쁨이 되고, 행복도 나누어야 행복이 된다. 행복의 독점, 경제의 독점은 불행으로 이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 현대의 화두이다.

지난 한 세기는 전쟁의 100년이었다. 그러나 인류는 전쟁을 계속하면서 세 가지의 귀중한 교훈을 배웠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이념) 보다 자유가 낫고, 자원보다 두뇌가 나으며, 대립보다 공존이 낫다는 진리다.


대립이란 ‘내가 너보다 우월하다. 너는 나를 따라야 한다는 교만이다. 그러나 공존은 `함께 살자. 피차 돕고 의지하자. 함께 잘 되자’는 상생 철학에서 나온다.
놀랍게도 하나님 자신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파견하셨다. 그래서 예수의 다른 이름이 임마누엘이다.(마태복음 1:23) 이 히브리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죄 많은 인간들과 함께 사신 것은 하나님이 인간과 공존 하신 것을 가리킨다.

예수의 사상은 철저한 상생의 철학 위에 서 있다. 대접을 받고자 하면 먼저 남을 대접해야 한다. 오리를 가자는 자에게 십리를 동행하여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묻혀 죽어야 많은 결실을 한다 등, 그 예는 수없이 이어진다.

나는 크리스천의 삶을 이런 평범한 말로 표현한다.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친절하고, 직업생활에서 정직하고, 대인관계에서 예의 바르고, 판단과 결정에 있어서 공정하고, 불행한 사람과 약자를 도와주고, 악에 저항하며, 이웃과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이다.”

성 프랜시스가 어느 날 설교하러 나간다고 해서 수도사들이 뒤따랐다. 그런데 프란시스가 그 날 한 일은 거리에 앉아 어떤 가난한 노동자의 신세타령을 들어준 것과, 과일을 수확하는 농부들의 일손을 도와준 것과, 한 사람이 퇴비를 싣고 가는데 그 달구지를 밀어준 것과, 가게에 들어가 상인과 잡담을 나눈 것뿐이었다. 실망한 수도사가 불평하였다. “오늘 우리는 선생님의 멋진 설교를 들으려고 하루 종일 따라다녔는데 설교는 한 번도 안 하셨습니다. “ 그에게 프랜시스는 웃으며 대답하였다.”나는 오늘 열 번 이상 설교하였는데요.“

금년은 한국전쟁(6.25사변) 발발 64주년이다. 좁은 한반도에서 사상자 400만 명이라는 세계역사상 초유의 참사였다. 미군 전사자만 5만4,246명, 부상자 103,284 명을 냈다. 과부 고아 이산가족이 홍수를 이루고, 가옥 교량 도로 공장들이 파괴되어 한반도는 초토화 되었다. 이런 비극이 또다시 일어나선 안 될 것이다. 평화는 남북한 모두의 지고선(至高善)이다.

예수는 ‘화평케 하는 자’(Peace maker)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단언하였다.(마태복음 5:9) 평화를 원하거나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평화를 위하여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이 부여된다는 말씀이다.

싸움이라는 사건을 놓고 몇 종류의 사람이 있다. 싸움 붙이는 자, 싸움의 여건을 조성하는 자, 구경꾼, 싸움을 계획 하는 자, 직접 싸우는 자 등이다. 예수의 축복인 ‘화평케 하는 자’는 그 모든 태도에 해당 하지 않고, 싸움을 말리거나 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자이다.

예수가 인류에게 유산으로 남긴 말씀을 들어보라. “내가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준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 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라.”(요한복음 14:27)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자의 전통과 사명은 평화의 릴레(Relay-전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수가 시작한 ‘천국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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