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

2014-06-2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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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 <객원논설위원>

신학만큼 난해한 학문도 드물다. 철학은 과학이니, 논리적 혹은 변증법(정·반·합)적으로 풀어나가면 된다. 그러나 신학이란 그렇지가 못하다. 신학(神學·Theology)은 종교와 연관되어 세상을 있게 한 절대자를 연구하는 학문이기에 과학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 영성의 종교도 이와 마찬가지다.

신학에서 우선되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신(神)에 대한 정의로, 신관(神觀)이 잘못되면 신학의 학문에서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것과 같다. 어릴 때의 신앙에서,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듯이 신관도 마찬가지다. 올바른 신관을 가지려면 성숙한 신앙과 폭넓은 포용이 전제 되어야 한다.


기독교에서의 신은 하나님(God)을 말한다. 천주교에서는 하나님을 하느님이라 부른다. 하나님이란 이름은 구약(Testament)에 나오는데 두 이름이 있다. 하나는 엘로힘(Elohim)이고 또 하나는 야훼(여호와·Yahweh)다. 구약성경의 창조이야기는 두 저자로 구분된다. 창세기 1장1절에서 2장3절까지와 2장4절 이후다.

성서학자들은 첫 번째 창조이야기의 제사문서(P문서)를 기원전 6세기, 두 번째 창조이야기의 야훼문서(J문서)를 기원전10세기경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이렇게 둘로 구분하는 것은 문체가 판이하게 다르며 천지창조의 구성도 틀리기 때문이다. 엘로힘하나님은 천지창조를 장엄하게 한다. 야훼하나님은 사람부터 만든다.

기독교의 신관은 여러 단계를 거처 현대신학에서는 범재신론(汎在神論·panentheism)에 다다른다. 범재신론이란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정통주의 신학의 하나님, 즉 초월된 신과 로빈슨(John A.T.Robinson)신부가 <신에게 솔직히(Honest to God)>란 책에서 말하는 체험 속에 발견되는 내재적 신을 함께 한다.

쉽게 풀면 하나님은 우주를 지배하며 하늘위에도 계시지만,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 보면 된다. 즉 초월된 신이면서도 내재적인 신으로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역사를 통치하시지만 우리 개개인의 몸과 영혼 그리고 우리들의 아픔까지도 함께하여 같이 아파하시는 하나님이라 풀이하면 되겠다.

기독교 신관, 즉 하나님을 해석하는데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선(善)과 악(惡)의 문제다.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역사를 주관하는 전지전능의 하나님이라면 악은 어디서 왔나? 세상을 피폐하게 만드는 악의 근원, 난제 중 하나다. 또 착한 자들이 고통 받고 악한 자들은 복 받아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또한 난제다.

어느 신학자는 말한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재난과 고난과 악은 왜 존재할까?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실까. 이러한 질문은 인류 역사만큼 오래된 질문이다.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하나님의 뜻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세상엔 악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범재신론의 신이라면 고통 속에서도 함께하는 신이어야만 한다. 허나, 악은 독버섯처럼 번지며 세상을 지배하려 하는데 신은 언제까지 침묵하시려는가? 란 질문이 사람들을 종교를 떠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서의 선과 악의 공존(共存)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만인에 적용되는 공의와 사랑에 있지 지배를 통한 고통과 착취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한국민족 식민지배와 6.25를 통해 갈라진 한반도의 남북분단을 하나님의 뜻이라 하고, 거기에 기독교정신을 운운한 한국의 문창극 국무총리후보는 도를 넘어도 한참 넘어섰다. 그의 역사관이 의심스러울 정도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했다. 현대신학에서의 하나님 존재는 범재신론에 연한다. 하늘에도 계시고 우리의 일상에도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선과 악의 공존은 신학의 가장 오래된 숙제중 하나다. 하나님의 뜻은 공의와 사랑에 담겨 있다. 식민지배와 남북분단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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