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해방정국과 한국의 현실

2014-06-11 (수)
크게 작게
여주영(주필)
얼마 전 뉴욕타임스에 한국관련 대형광고가 실렸다. 미국 내 한인여성 커뮤니티 사이트인 ‘미시 USA’가 4,000 여명의 미주한인들로부터 모은 약 16만 달러의 모금액으로 실린 광고이다.

주로 세월호 참사가 박근혜 정부의 무능한 대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과 ‘박근혜 대통령 하야 운동에 서명을 해야 한다’는 내용의 강한 어조가 담긴 글들이었다. 반대로 광고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들을 세월호 참사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세력, 심지어는 ‘종북 좌파들’이라는 격앙된 반응까지 보였다.
이에 대해 적지 않은 한인들이 “해외 한인들이 고국의 비극적 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면서 “광고까지 낸다는 자체가 좀 지나치다”고 우려감을 표했다.

미시 USA가 세인의 주목을 끈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성추행 사건의 의혹을 처음 제기해서 사건을 공론화시킨 곳이 바로 이 사이트였다. 이런 것을 볼 때 이제는 미주한인사회가 한국 내에서 발생하는 대형사건, 사고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뉴욕타임스에 한국정부 이미지를 크게 훼손시키는 고액광고가 대문짝만하게 실리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하야를 쉽게 부르짖는 한국정국은 마치 6.25직전의 해방정국(1945년 8.15광복 후 이승만 초대대통령 취임까지 3년)을 떠올리게 한다.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라는 조직들을 통해 국가질서를 신속히 확립해야만 하는 당시 상황은 현재 박근혜 정부가 겪고 있는 상황과 아이러니컬하게도 교차되는 것 같다.
해방정국 속의 사람들은 이성적인 분별력을 잃고 정치혐오증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신탁통치라는 현안을 두고 좌우간의 이념대립이 극에 달했다. 얼마 후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은 반백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역사적인 이념 갈등의 대리전이었을 뿐이다. 질기고도 처절한 이 이념전쟁이 아직도 한반도에서는 현재진행중이다.

구소련 스탈린시대의 인민숙청, 중국 문화혁명의 대량학살 등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서도 아직도 이념의 딴죽을 걸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1960년대 후기의 중국 문화혁명 당시 모택동은 이성이 마비된 홍위병들을 부추기면서 자신의 정치적인 목표를 달성하려 했다. 선동과 인신공격은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의 기본 무기였고, 상식적인 사고를 하는 보편적인 사람들은 그들의 투쟁과 시위에 의해 희생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념전쟁의 투쟁방식인 선동과 인신공격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고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는 곳이 안타깝게도 우리의 조국 한국이다. 전 세계 이념 전쟁은 이미 종결되었지만 분단 60년이 지나 이산가족들이 모두 저 세상으로 가고 있는 오늘, 한국은 다시 이성이 마비된 해방공간으로 회귀중인 것 같아 마음 씁쓸하다.

며칠 전 한국에서 치러진 6.4 지방선거 결과는 지난 대선 때와 거의 유사하게 여야 반반씩의 승리로 나타났다. 온 나라를 뒤흔든 세월호 참사에도 불구하고 여당이 예상보다 크게 참패하지 않은 것은 아직도 박근혜 대통령에게 지원사격을 보내는 민심이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난 미시 USA가 목소리 높여 주장하던 ‘박근혜 대통령 하야하라’는 구호가 크게 먹히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로 이번 선거에 미주한인들의 관심도 높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민심의 의중은 이번 선거에서 확실하게 나왔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대의에 의한 선거결과에 따른 것이다. 해외한인인 우리는 한국의 변방에 있는 사람들로서 한국정치나 사회 상황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만한 입장은 못 된다. 다만 더 좋은 방향으로 갈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무작정 시끄럽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에 더욱 충실한 것이 해외한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닐까.
juyoung@koreatimes.com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