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친구

2014-06-0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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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 (아동문학가/ 목사)

셰퍼드 이탄(Ethan)은 아주 못생긴 개다. 뇌까지 손상되어 사람으로 치면 정신질환자이다. 좋은 점 하나가 있다면 온순하여 짖지도 않고 물지도 않는다. 뉴저지 릿지필드 파크의 개병원에 있던 이탄이 오하요 훈련소에 가서 400일의 훈련을 받았다. 이 훈련소는 상이(傷痍) 군인을 돕는 개를 훈련한다.

훈련을 마친 이탄이 지난 주 맞이하게 된 새 주인은 뉴욕의 먼탈반(Luis Montalvan) 씨이다. 그는 이라크에 두 번 출전하였던 상이군인으로 척추병과 보행 장애, 뇌도 손상을 입은 중증 상이군인이다. 먼탈반 씨는 이탄을 친구라고 부른다. 이 개는 자기를 완전히 새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고백한다.


이탄은 24시간 먼탈반 씨를 돌본다. 슬픈 기색이 있으면 장난을 쳐서 그를 웃기고, 외롭게 보이면 주인의 목덜미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주고, 밤에도 떠나지 않고 발치에 누워 그를 잠들게 한다. 오하요 상이군인 보조개 훈련소 소장인 달링 씨는 “훈련의 목표는 개들이 상이군인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게 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지적해 본다. 첫째 그들은 자기의 생애를 바칠 만한 큰 꿈, 비전이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그들의 앞길을 가르쳐준 좋은 스승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셋째로 그들은 최소한 한 명의 좋은 친구가 있었다는 것, 깊이 사귀고 꿈을 나눌 수 있는 좋은 친구가 있었다는 점이다.

발전을 위해서는 경쟁도 필요하다. 그러나 우정(友情)을 경쟁보다 한 발자국 앞세우는 태도를 나는 ‘아마추어 인생’이라고 부르고 있다. 운동경기에서도 돈을 앞세우는 프로보다 경기 자체를 중히 여기는 아마추어가 더 가치를 지니듯 이익을 전제한 사귐보다 정을 앞세운 친구가 훨씬 가깝고 인간미가 있다.

예수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불렀다.(누가복음 12:4) 그들을 가르치는 입장이지만 훈시(訓示)한 것이 아니라 친구로서 진리를 나눈 것이다. 그들을 가까이에 두었지만 훈련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고 따르도록 친구로서 모범을 보인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를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불렀다.(마태복음 11:3) 예수는 제자들뿐이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악평을 받고 있는 세리(稅吏-동족의 혈세를 착취하던 로마의 앞잡이)의 친구라는 평을 기꺼이 받았다. 권력을 악용하는 나쁜 인간들이지만 그들의 친구도 되어 새 사람의 길로 인도하였던 것이다.

한국적인 것(Koreaness)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우정(友情)이라고 대답한다. 우정은 울림(echo)이다. 퉁소 가야금 장고 등은 모두 울림을 주로 한 악기들이다. 이 악기들이 본음도 중요하지만 여음(餘音)을 주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울림의 맛을 살리기 위해서이다. 물론 서양 음악가로서도 바흐 같은 사람은 ‘음과 음 사이에 대한 처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함으로서 울림의 중요성을 인정했지만, 음과 음을 연결하는 울림이란 인간관계로 말하면 역시 ‘한국적인 것’으로서 지적되는 정(情)이다.

지금은 물질문명, 개인주의, 정치풍토의 경직(硬直)으로 한국적인 울림이 많이 깨졌지만 그래도 회사나 교회나 이 ‘울림’이 중요한 유대관계가 되어 운영되고 있다. 걱정스런 것은 지연(地緣) 학연의 풍조가 남아있는 것인데 이런 고리에서도 빨리 벗어나야 세계를 향한 발 돋음이 가능하다. 대만의 신학자 송천석 박사는 이 ‘울림’을 한국인뿐이 아니라 아시아인 전체의 공통적인 인간성으로 지적하고 있다. 사상적인 동질감이나 정치적인 유대보다 ‘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맺어보려는 폭 넓은 지도자는 안 나타날 것인가?

솔로몬은 “사랑이 언제나 끊어지지 않는 것이 친구다.”(잠언 17:17)고 정의하였는데 어떤 환경에서도 유대가 끊어지지 않는 친구라면 얼마나 좋은 친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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