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무죄석방과 이한탁씨

2014-06-0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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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 <객원논설위원>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죄인으로 몰려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한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일까. “무죄”라고 수없이 주장해도 한 번 내려진 판결은 쉽게 철회되지 않는다. 그래도 무고한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여 무죄를 이끌어낸 사람들이 있다. 여기엔 친구와 가족, 그리고 인권운동가들의 노력이 포함돼 있다.

1966년 뉴저지의 한 술집에서 백인 3명을 죽인 살인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흑인 권투선수 루빈 카터. 그의 예명은 ‘허리케인 카터’인데 미국의 흑인배우 덴젤 워싱턴의 카터의 일생을 그린 영화 ‘허리케인 카터’에서 비롯됐다. 카터의 살인죄 적용은 인종차별의 상징이 되었고 수많은 흑인들을 분노로 몰아넣게 했다.

카터는 프로복싱 미들급 세계챔피언까지 지냈다. 그는 무죄를 주장하여 1976년 재심이 열렸으나 유죄였다. 그러던 것이 레스티 마틴이라는 흑인소년(16세)과 인권운동가들의 끊임없는 노력에 힘입어 19년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1985년 무죄로 석방됐다. 한 많은 인생을 살았던 그는 지난 4월20일 76세의 나이로 숨졌다.


25년 만에 자유를 찾은 또 한 사람. 흑인 조나단 플레밍이다. 그는 26세인 1989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친구 데릴 러시를 총으로 쏴 죽인 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그 때 플로리다 올랜도에 있었다. 그가 올랜도에서 뉴욕으로 장거리 전화 한 것을 호텔측의 전화요금 영수증에서 찾아낸 변호사가 증거로 제출했고 받아들여졌다.

브루클린지방법원은 제출된 알리바이를 증거로 입증했고 결국 그는 지난 4월8일 무죄로 석방됐다. 그의 나이 51세다. 인생의 가장 활동기인 20대와 30대와 40대를 철창 안에서 보낸 셈이다. 세상으로 다시 돌아온 조나단은 은행계좌를 열며 비밀번호에 14를 첨가했다. 자유를 다시 찾은 2014년을 기념한 ‘14’숫자이다.

조나단의 부인은 옥중 이혼했고 이미 33세인 아들은 교도소에 있다. 이처럼 가정이 파탄된 걸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조나단은 자신처럼 억울한 이웃을 돕고 싶어 법대에 진학해 변호사가 될 꿈을 갖고 있다. 25년간의 감옥생활. 그는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 중에 있지만 25년간의 젊음을 되찾을 길은 없다.

10년이 넘었다. 이한탁씨가 방화하여 딸을 죽음에 몰아넣었다는 펜실베니아에 있는 기도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기름을 부어 불을 붙였다는 검찰의 기소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내려와 전문감식가들이 감식한 증거자료를 바탕으로 몇 번에 걸쳐 이한탁씨는 방화범이 아닌 무죄라고 칼럼을 썼다.

그런 이한탁씨가 드디어 석방 전 단계에 와 있다. 지난 5월29일 펜실베니아 해리스벅 소재의 필라델피아 연방3순회항소법원은 이씨 사건에 대한 증거심리를 열어 검찰의 화재감식 기법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딸 지연(20)을 방화해 살해했다는 혐의로 긴급 체포된 뒤 종신형을 선고받은 후 무려 25년 만의 쾌거다.

앞으로 남은 절차는 재판을 주제한 마틴 칼슨 판사가 권고문을 작성해 사건 최종 판결자인 윌리엄 니닐론 판사에게 전달하고 이한탁씨는 재심을 청구하여 무죄 판결을 받으면 석방된다. 4반세기를 감옥에서 보낸 이한탁(79)씨.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아버지와 같이 기도원에 갔다 참변당한 지연양이 하늘에서 기뻐할 거다.

검찰의 이씨 유죄입증을 무효화시킨 존 렌티니박사는 뉴욕시소방국 화재관 출신이며 그는 최신 현대과학 기법으로 조사를 실시해 당시 화재가 방화가 아님을 밝혔다. 이 감식자료는 화재 직후 작성됐지만 그동안의 재판과정에서 한 번도 증거로 채택되지 않다가 지난해 비로소 받아들여졌고 이를 판사가 인정하게 된 것이다.

지난 25년 동안 미주에서 무죄로 풀려난 사람은 1,350명에 달한다 한다. 루빈 카터의 19년 옥살이, 조나단 플레밍의 25년 옥살이, 이씨의 25년 옥살이 등등 지금도 죄 없이 죄를 사는 사람은 많이 있을 거다. 그들의 잃어버린 세월을 그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으랴. 이한탁씨 구명을 위해 힘쓴 모든 분과 단체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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