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서 본 통바위 캐켈터널 안에 있는 바위창문
버스가 Checkerboard Mesa(봉우리가 평평한 산)라는 거대한 통 바위산 앞에서 멈췄다. 바위에도 결(Stone Fin)이 있다는 걸 온몸으로 증거하고 있다. 물이 바위에 스며들었다가, 심한 일교차로 일 년 에 200일은 얼었다 녹았다 반복해서 생긴 결들인데, 이름대로 체크무늬처럼 금이 그어져있는 게 참 신기하다. 퇴적암의 특징가운데 하나로 지질학적 용어론 사층리(Cross bedding)라 한다. 물이 흘렀던 방향, 모래를 운반했던 물의 깊이까지 추정 가능케 해, 퇴적당시의 역사와 지질학의 중요한 단서가 된단다.
꼭 집어 묘사가 안 되는 복합 미묘한 색의 암 봉, 모래바위, 통 바위들이 병풍을 친 곳을 지난다. 큰 바위 머리위엔 작은 탑들인 피너클(Pinnacles Spires)이라는 뾰족한 바늘 성을 쌓았는데, 저마다 기기묘묘한 자태다. 신의 조각품이 아니고서야 저럴 수가 없을 만큼.
아스라이 높은 암 봉 꼭대기나 틈새에 박힌 소나무들이 신령스럽다. 솔잎들이 꽃처럼 한 덩이씩 뭉쳐 달린 고산소나무 폰데로사(Ponderosa Pine)라 검푸르다 못해 거무스레하다. 색조화장을 끝낸 바위가 푸른 립스틱을 바른 격으로 무결점의 색채궁합이다. 그나저나 저 나무들은 인간이 도저히 범접할 길 없는 하늘가의 깎아지른 절벽 끝에서, 어찌 저리 고고하고 기상이 높게 뿌리박고 살 수 있는 걸까? 한시도 바람 잘날 없는 저런 곳에서, 얼마나 어지럽고 진 빠지고 갈증에 시달릴까? 차창으로 잠깐씩 치켜 올려 보는 것만도 현기증이 나는데 말이다. 소나무는 햇빛을 양껏 받아야만 살아남는 나무라지만, 인간이 밥만 먹고 살수 없는 이치처럼, 햇빛 만 쬐며 살수 없는 건 자명한 사실.
그럼에도 신성할 만큼 의연하고 청정함에 경외감이 든다. 왜 우리국민의 70%가 소나무를 제일 좋아하는 나무로 꼽을 만큼 친숙한지, 참으로 고단한 역사를 이겨낸 우리 민족의 기개를 대변해주며 사랑받아왔는지, 유추되는 바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성삼문의 결언인 시조가 절로 입가에 맴돈다. ‘이 몸이 죽어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정하리라.’
앞의 기차굴 같은 1,7마일구간의 Mountain’s Carmel 터널입구가 보인다. 이 터널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지형이 별개의 공원인양 차이가 있단다. 1920년,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살리고자, 웅대한 통 바위산을 폭약과 시멘트를 일절 안 쓰고, 사람이 기계로만 긁어냈단다. 굴속을 지나는데 오른쪽에 작은 창처럼 구멍이 났다. 그런 바위창문이 5개인데, 세 번째는 좀 낮은 대신에 크고 쌍둥이다. 그 쌍둥이 창문에만 쇠창살그물망이 쳐있다. 그 지점의 절벽 골이 가장 깊어, 시멘트를 안 발라 야기되는 낙석방지와 자살방지차원에 설치했단다. 바위 창으로 힐끗 보니 천길만길의 절벽과 장대한 암 봉들이다. 쇠창살이야말로 필수장비다.
동쪽은 고도차가 1500m나 돼서 그런가. 버스가 갈지자 모양으로 스위치백 (Switchback) 도로를 간다. 그 옛날 영동선 기차를 타면 삼척 근처 어디쯤에서 스위치백 하던 구간에 비하면 훨씬 높고도 길다. 스위치백도로를 내려다보니, 빙글빙글 완전 뱀이 똬리를 틀었다.
버스가 높은 재를 넘느라 힘이 들었던지 잠시 내리란다.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으리으리한 위용의 석회암 통 바위 밑이라, 재차 압도된다. 저렇게 영원무궁한 자연의 시선으론, 인간의 짧고도 짧은 현생의 삶이 하루살이 같겠다. 또한 작디작아 개미만치도 안 보일 인간들이 얼마나 하찮을까. 무상에 잠겨 거대한 통 바위산을 올려다보니, 지나온 터널의 바위창문이 까마득히 높은 데서 내려다보고 있다.
그 단추 구멍만한 빠끔한 구멍을 보는 순간, 영화 ‘나바론의 요새’
에서, 절벽바위구멍에 감춰진 독일군대포의 포신이 은밀하게 나와 있던 장면과 겹친다. 실제론 클래식 서부영화인 ‘맥켄나의 황금’에서, 그레고리 팩이 마지막장면에 황금색절벽 앞에 이르던 곳이 바로 여기란다.
맞은편은 굽이굽이 S자형인 버진 강이 흐르는데 트레킹 족들도 보인다. 보기엔 딱 시냇물수준인데도 강이라니 좀 우습다.
그래도 오른편에 나타났다 왼편에 나타났다 휘돌아 흐르며, 웅대한 붉은 암벽들의 단층을 침식시켰고, 동식물이 깃들게끔 해줬다. 우대식 시인의 <강이 휘돌아가는 이유>란 시 구절을 보면, ‘강이 휘돌아가는 이유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보여주기 위해서이고, 굽은 곳으로 생명이 깃들기 때문이며, 강마을에 사는 모든 것들에 대한 깊은 감사 때문’이라고 했다. 버진 강도 왜소함에 비해 업적만큼은 지대했으니 절대 얕볼 일이 아니다. 사람도 외양만보고 판단했다가 큰코다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처럼.
어찌된 게, 도봉산 인수봉은 증손자뻘도 안 되는 붉고 장구한 바위 돔들의 행진은 멈출 줄을 모른다. 수직의 주상절리들이 파이처럼 겹쳐진 곳도 있고, 풍화가 깎아낸 사암들이 마치 옹기의 빗살무늬처럼 무늬가 새겨지기도 했다. 자이언을 두고 남성적이라고들 하게 생겼다.
해발이 점차 낮아지는지, 고산병 증세는 눈 녹듯 사라지고 시나브로 시장기가 엄습한다. 이번엔 대자연의 숨결이 빚어낸 벌집(The Honey Comb)이란 통 바위다. 규격이 다른 구멍들이 있는데, 밀가루 반죽으로 빚은 건지, 뽀얀 진흙이 마른건지 매끈매끈해 보인다. 샌드페이퍼로 나무를 다듬은 듯 결이 살고 반드르르하다. 매끈한 통 바위엔, 마치 바람이 사막의 모래를 부드럽게 빗질하거나, 파도처럼 쓸고 간 바람무늬도 있다. 맑은 강 물살이 모래바닥에다 새기고 간 물결무늬도 있다. 만져보기 전엔 절대 바위라는 게 믿기지 않겠다.
좀 더 가니 아이싱 모자를 쓴 컵케이크이거나 찐빵도 있다. 또 부드러운 곡선들이 너울처럼 굴곡이 지고, 맨드라미꽃처럼 끝 가에 주름이진 바위들이 많다. 영지버섯 공장이라고 칭한다는 가이드의 말을 들으니, 바위들 전부가 버섯으로 둔갑한다. 야한 오렌지색의 바위는 ‘나도 영지버섯’해도 독버섯일 거였다. 어떤 통 바위엔 팥 색이 줄지어 들어가 있어 먹음직스런 시루떡이나 초콜릿 레이어 케이크다. 인젠 뱃속시계가 막 종을 쳐서 그런가. 바위들이 전부 먹을 것으로만 오락가락한다.
인제 13마일이나 줄 창 따라오던 우람한 바위능선들과 작별했다. 30마일쯤 지나자, 키 큰 나무들이 오아시스 숲처럼 몰려있는 곳은 어김없이 마을을 품고 있다. 선인장들만 드문드문 박힌 광활한 사막지대다. 황폐한 대지에 나타나는 시소 같은 것들은 오일펌프란다. 모하비가 전혀 쓸모없는 사막이 아니라 복덩어리사막인 증거다. 조국엔 왜 이런 복덩어리도 없는지 안타깝기 한량없다. 광야와 황무지를 지나 3시간 만에 라스베가스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으러 간 곳이 아침을 먹었던 식당이다. 비좁고 신참이라지만 반겨주는 마음이 느껴진다. 초심을 잃고 영리만 따지던 번듯하고 큰 어제의 고참식당보다, 훨씬 사람냄새가 난다. 하늘이 도와 메뉴도 김치 전골이다.
고산병에 시달린 내겐, 김치찌개야말로 천상의 음식이다. 못 먹은 도시락의 나물반찬까지 해먹으니 금상첨화다. 매운 음식을 못 먹는 은이 문제다. 그래서 혹시 아침에 먹었던 콩나물국이 있냐니까, 쾌히 미역국까지 곁들여서 준다. 별도비용추가도 없이. 객지에서 만난 푸근한 동포애다. 은과 나는 기분 좋게 먹은 특효약으로, 그야말로 기가 ‘하늘만큼 땅만큼’ 충전됐다.
세계에서 네 번째고 라스베가스에서 최고이며 사람들의 선호도 1위인 벨라지오 호텔로 갔다. 벨라지오는 이태리 남부의 조그만 도시이름인데, 그곳 출신인 라스베가스 호텔업계의 대부 격인 스티브 윈(Steve Whnn)이 지은 것이다. 영화 ‘오션스 11’을 찍은 곳이기도 하다.
로비에 들어서자 천장을 덮은 현란한 유리조형물이 눈을 사로잡는다. 다양한 비비드 칼라의 연꽃들과 파스텔 톤의 종이우산 같은 것들이 천장을 온통 수놓고 있다. 공예솜씨가 하도 입체감 있고 생동적이라, 색색 옷을 걸친 해파리들의 군무다. 스티브 윈이 부인에게 헌정한 걸로 무려 300만 불이나 들인 거라나. 크리스틀 궁전마냥 화려하기 이를 데 없지만, 얼마든지 세계인을 위해 뜻 깊게 쓸 수 있는 거금이라, 한 개인을 위한 용도치곤 과했다.
로비에 이어져 있는 식물정원도 봤다. 계절에 따라 또는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주제를 바꿔 조성하는 테마가든 이다. 꽃과 다양한 식물들 외에도 개구리, 달팽이들, 꽃 옷을 입은 동물의 꽃 조형물 등이 귀엽고 리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엔 생생하지 않고 빛바랜 꽃과 진 배 없다. 엄연한 생화들임에도 자유의지가 꺾인 인위적인 미라 그런지, 실내에 있어 그런지, 가공적인 인형의 미소만 연상시킨다.
들에 핀 야생화와 온실 속 화초의 차이쯤 될까. 하여간 꽃들이 기운이 없고 숨 막혀 하는 게 느껴진다. 꽃들은 태양빛을 받는 원래의 자기자리에서, 제 의지대로, 마음껏 팔다리를 뻗으며 자유로이 피어나길 원했을 거였다. 사람도 강요당하지 않고, 좋아하는 자기맞춤의 자리에 있어야, 반짝반짝 빛나지 않던가.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시처럼 느끼면 다시 보이려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그 모든 순간이 다아/꽃 봉우리 인 것을/... ]
호텔 앞 호수에서 분수 쇼를 할 시간이 돼 밖으로 나왔다. 설치비만 무려 4000만 불이나 들었단다. 음악에 장단 맞춰 1250개의 분수꼭지가 6분에서 8분 동안 물줄기를 뿜는단다. 더해서 4500개의 조명장치로 분수들이 시시각각 황홀한 색깔로 변하는데다, 높이가 최고 80m까지 이른다니 장관이겠다. 음향설비까지 최상급이라 낭만을 한껏 조장한다니 무척 기대가 된다. 호숫가엔 이미 구경꾼들이 이중삼중으로 뺑 둘러섰다. 이왕이면 파리무드에 젖어보자며, 에펠탑을 정면으로 마주한곳에다 자리를 잡았다.
사전에 가이드가 분수 쇼에 대해 해준 얘기가 있다. 나오는 음악이 다 유명 곡들이고 분수 춤도 엇비슷하다. 그중에 ‘눈먼 천사’라는 팝페라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 노래가 제일 길고 멋지다.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쏘아 올리는 물기둥이 가장 역동적이고 파장도 제일 격렬해서란다. 노래가 제일 짧고 춤도 밋밋한 곡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Viva Las Vegas’니까, 그 노래만 안 걸리면 된다고.
그런데 세상에! 하필, 설마 했던 그 노래가 싹 나온다. 실망이지만, 바람심한 날은 숫제 쇼를 취소한다니 그나마 다행인가. 가녀린 선율에선 분수가 슬픔에 흐느끼듯 멈칫멈칫한다. 은근하고 낮은 곡조에선, 왈츠를 추는 듯 물줄기가 우아하며 경쾌하다. 강한 리듬에선 열정적인 탱고를 추는 양, 온몸을 내던지며 물줄기를 사방으로 휙휙 휘어가며 내뿜는다. 클라이맥스에 이르자 쾅! 폭발하듯이 검은 허공을 향해 끝없이 물줄기가 치솟았다.
깊은 땅속에서 죽은 듯 숨죽이고 있다가, 한순간 장엄하게 하늘로 물줄기를 분출하던 옐로스톤의 Old Faithful 이 자동적으로 연계된다. 제일 별로라는 곡의 분수 쇼가 이정도니, 좋다는 노래의 춤은 얼마나 더 길고 근사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