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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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9) 13개의 독립국가 (하)

2014-05-2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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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

영국에서는 Puritans들에 대한 핍박이 계속 더욱 심해져서 1630년에는 비교적 부유하고 유력했던 Puritan 천 명이 왕의 허가를 얻고 Massachusetts Bay 로 이주했다. 이때에 John Winthrop도 그 일행으로 건너와서 지사를 하며 colony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1640년까지 2만여 명의 Puritans들이 추가로 와서 보스턴 등 7개 도시를 개척하고 정착한다. 이들은 ‘City upon a Hill’같은 세계에 모범이 되는 장소를 만들자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를 찾아 조국을 떠나 새 땅의 개척과 정착에 성공한 Pilgrims들은 일단 자신들이 통치를 하게 되자 새로운 종교탄압을 시작했다. 청교도적인 교리를 비판하거나 하루에 두 번씩 예배를 드리지 않거나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벌금을 매기거나 심하게는 감옥소에 넣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보스턴 인근의 Salem에서는 돌보아줄 사람이 없는 노파들을 마귀라고 인민재판식으로 쉽게 정죄한 후 여러 명을 연속적으로 불태워 죽이는 ‘Salem Witch Hunt’같은 끔직한 일들도 벌어졌었다. 로저 윌리엄스라는 한 젊은 목사가 설교에서 이 같은 종교행패를 비난하자 교회에서 배척을 당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고 한다.

‘종교의 자유’를 위해서 탈출한 윌리엄스 목사는 원주민들로부터 땅을 구입해서 로드 아일랜드 주를 창립하고 모든 일들이 ‘신의 섭리’에 의해 이뤄졌다는 의미로 수도를 Providence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메사추세츠 사람들은 로드 아일랜드를 t‘he Lord’s debris (하나님의 쓰레기)‘ 라고 불렀다. 그 무렵 Massachusetts Bay 사람들이 충실히 경건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던 일부의 사람들은 하트포드를 개척하였고 다른 일부는 뉴헤이븐에 정착하였다가 후일에 합쳐서 커네티컷 주가 되었다.

Proprietary Colony로 시작한 주가 여러 군데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펜실베니아 주와 조지아 주의 경우를 간단히 설명해 보고자 한다.

영국의 종교개혁파들 중에서 가장 강경했던 사람들이 퀘이커교도들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철저한 평화주의자, 평등주의자들로서 교회에서 목회자들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공직자들 앞에서도 모자를 벗지 않았으며 국방의 의무도 거부했던 탓에 영국에서 가장 탄압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옥살이까지 하고 나온 윌리엄 펜이라는 퀘이커 교도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퀘이커가 아니었으나 유명한 해군제독으로서 아주 부자이어서 영국의 왕 찰스2세에게 거금을 대여해준 사람이었다고 한다. 윌리엄 펜은 매우 설득력이 있는 사람이었던 탓에 아버지의 후광을 얻어서 “종교의 자유를 실천하겠다”는 약속으로 지금의 펜실베니아 주를 찰스2세로 부터 얻어냈는데 왕은 그 아버지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면서 1682년에 땅을 내주었다.

이들은 펜실베니아에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자신들의 비폭력, 평화주의, 평등주의 등의 종교적 신념을 실천하면서 살았는데 그런 종교적 신념의 실천이 새땅을 개척하고 정착해야하는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타협을 거부해왔다.

퀘이커들은 정권을 빼앗긴 1755년까지는 전체인구의 4분의1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회 의석의 4분의3을 차지해 왔었는데 펜실베니아 서부지역의 정착민들이 원주민들의 습격을 받아 말살되고 있는 동안에도 ‘공격에 대한 비저항주의’ 원칙에 따라 국방예산도 짜지 않고 있다가 주민들의 항의에 밀려 ‘빈민구제’라는 항목으로 국방예산을 짜고 ‘비료구입비’란 명목으로 화약 구입비를 예산에 올리는 등 비현실적이고 위선적인 정치를 하다가 1756년에 집권에서 밀려났다.

극도의 ‘경건주의 기독교인’들인 아미시가 살고 있는 랭카스터 지방을 미국사람들은 Dutch country 라고 부르며 아미시들을 Pennsylvania Dutch라고 불러서 그들이 화란 이민자들인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그들이 독일계통 이민자들로서 미국사람들이 ‘Deutsch’를 ‘Dutch’로 잘못 발음한 탓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한 가지 얘기는 아미시 사람들은 자신들 이외의 모든 외부인들을 ‘English’라 부르고 있다.


펜실베니아가 퀘이커교도들이 정착에 성공하면서 종교의 자유를 실천하고 최소한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실천해본 성공적인 예라면 조지아는 이상주의자들이 비현실적인 방법을 써서 철저하게 실패한 예라고 할 수 있다.

1700년대 초에 런던은 농촌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인구 폭발 상태에 있었고 실업률이 엄청나게 높았고 채무자 형무소에는 재소자들이 많았고 범죄가 넘치는 도시이었다. 아무도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 영국의 상류층들은 중국에서 엄청나게 비싼 돈을 주고 수입해오는 비단옷감을 사드리느라고 가산들을 탕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의 두 가지 문제를 일석이조로 해결해버릴 희한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사회개혁주의자’ 라고도 불렸던 James Oglethorpe 을 포함한 21명의 사회명사들이 왕으로부터 “날씨도 항상 좋고 땅도 비옥하다”는 조지아 (조지 2세를 따라 명명된) 라는 땅을 개척하라는 Charter를 1732년에 받은 것이다.

이들의 생각으로는 런던에 차고 넘치는 골칫거리들을 조지아로 보내면 자선사업처럼 좋은 일일 것이고 그들을 조지아에 정착시키면 그 무렵 북미로 북상해 보려고 노력중인 스페인을 막아주는 방패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하나 더 기가 막히게 좋은 소식은 조지아에서는 뽕나무(Mulberry tree) 가 잘 자라기 때문에 누에를 길러서 비단을 생산하면 중국에서 비싼 비단을 사들여올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와! 이와 같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소식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들은 즉시 책상을 맞대고 계획에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성분이 불량한’사람들이 가게될 것임으로 조지아에는 금주령을 내려야 하고 정착자들에게 토지소유권을 제한해야 할 것이며 그들이 딴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활동에도 여러 가지 제약을 두어야하며 자치권을 주어서도 안 되고 흑인노예를 써서도 안 된다는 등 책상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최상의 개발계획’을 짜내었다.

개발해야할 지역도 지정해 놓고 뽕나무만 심도록 하였다. Oglethorpe 이외에는 현지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양반”들이 수천마일 떨어진 곳에서 탁상공론을 끝낸 것이다. 그 다음단계로는 과대, 허위광고를 내서 개발단만 모아서 보내면 일은 끝난 것이라고 생각들 했을 것이다.

문제는 곧 터지기 시작하였다. 조지아에서 자라는 뽕나무는 비단누에고치들이 먹는 종류가 아닌 black mulberry tree인 것도 모르고 사방에 뽕나무를 심었다. 현지사정을 전혀 모르는 수정 계획만 계속 보내었다. 사업이 제대로 진전될 리가 없었다. 몇 년 안에 현지 정착자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1752년에 영국정부가 지원을 중단하면서 조지아는 Royal colony가 되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이 선포된 1776년까지 조지아는 13개주 중에서 가장 낙후하고 개발이 안 된 곳으로 남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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