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냥~’은 안 된다

2014-05-22 (목)
크게 작게
김주앙(화가)

2014년, 정확하게 4월의 한 가운데는 무참하고 참혹하고 잔인했다. 세월호는 그랬다. 차마 대지를 뚫고 얼굴을 내미는 여린 새 싹들조차 마주할 수 없었다. 눈물도 울컥거림도, 아니 분노함마저 감성의 치기어린 행위 같아 소름이 돋았다.

그냥 밥알을 삼키고 배설하고, 그냥 일하고 사람들 만나고 교회가고 그냥 수면 속으로 기어들었다. 머릿속은 하얀 포말이 일고 육체의 유기체들은 허공을 떠도는 듯 했다. 시도 때도 없이 깊고 차가운 물속에 잠겨들어 호흡이 정지되는 순간들이 증상처럼 일어났다. 그런 가상의 일상은 시간과 공간을 가늠할 아무런 여력이 보이질 않았다. 그렇게 세월호의 한 달은 그냥 흘러 가고 있었다.


얼마 전엔 어머니날 이라고 타주에 있는 친지가 전화를 했다. 세월호 이야기가 나왔다. ‘세월호는 어쩔 수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사고(accident)였을 뿐… 슬픈 일이지만 어쩔 건가, 산사람은 살아야지…’ 그의 간단명료한 소견이었다. 그의 간결한 그 말 한마디가 신기하기만 했다.

아마도 사람들의 절반은 그와 같은 생각일 것이고 절반은 아닐 것이다.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사고(accident)였을 뿐’ 이란 단어는 세월호가 강타했던 충격의 패닉상태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랬다. 세월호는 ‘사고’가 아니지 않은가! 무참한 살인과 어이없고 기막힌 ‘살인참사(massacre)’였다.
세월호 사고가 역대 지구촌의 대형사고와 완연하게 다른 점은 바로 생명들을 전원 구조할 수 있었던 시간을 방기하고 외면하고 눈을 감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살인자다” “우리 모두는 살인자였다” 라고 우리는 세월호앞에 분연한 참회의 고백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누구라 저만 살겠다고 도망친 선장일행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비열하고 탐욕스런 살인의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이고 우리들의 자화상 이었다.

이제 ‘그냥~’은 안 된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일어난 자리에서 한발 내 딛어야만 한다. 돌이키는 거다. 일어나고 돌이키는 행위가 바로 혁명이고 개혁이다.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가 구호를 외치는 것만이 혁명이 아니다.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안주하고 있었던 의식을 깨트리는 것이 혁명이다. 내가 변하면 너도 변하게 되어 있다. 나비효과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변한다는 것은 세상잣대로 보면 바보 같아 보인다. 바보가 되려면 거짓 없는, 가려진 내 추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내야 한다.

이제는 머릿속 깊게 쇠뇌당한 ‘잘 살아보세’의 주문을 씻어내야 한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본~’ 결과는 나라의 위상을 바닷속 깊이 침몰시키고 말았다. 교회도 더 이상 십일조 축복으로 황금알 쫓는 일에서 돌아서야 한다. 교회는 본연의 모습 그대로 가난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겁하고 기회주의자로 변질된 지식층은 더 이상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와서 책임전가의 일색인 사회적 양상을 바꾸기엔 너무 멀리 와 있는 듯하다. 그래도 지금 바로 이 시간은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중요하질 않겠는가. 앞으로 태어나게 될 새 생명들에게 싹을 틔우고 가꾸어 이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울창한 숲을 이루게 되는 꿈을 꾸자. 세월호 천사들아! 얘들아! 이제는 남은 자들이 어떻게 돌이키고 변하는가 똑똑하게 지켜 봐 다오. 부디…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