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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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방인숙의 서부 여행기 (3) 유타

2014-05-1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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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레이드 같이 펼쳐진 바위기둥 신비의 극치

▶ 브라이스의 해발 평균 8,000~9,000피트

6월 12일 수요일

라스베가스를 기점으로 남쪽이 그랜드 캐년(Grand Canyon), 동북쪽이 브라이스(Brice) 캐년, 그 중간지점이 자이언(Zion)캐년이다. 오늘 첫 일정은 250마일 떨어진 브라이스 관광이다. 브라이스의 유래는, 어느 몰몬교도인 브라이스란 목수가 집 뒷골 쪽에 숨어있던 캐년을 처음 발견한데서 연유됐다. 개인 땅을 피해 지정하다보니 미 국립공원 중 가장 좁단다.

산에 사는 백성들이란 뜻의 유타 주로 들어섰다. 유타 주의 특성인 거뭇거뭇한 바위산들을 비롯해 바위 군들의 외양이 심상치 않다. 키가 큰 세코이야 나무들도 많다. 전형적인 유타 주의 농촌을 40분정도 가는데 목초지에 검은 소들이 무리지어 자꾸 나타난다. 바로 블랙 앵거스 라는 일등급 쇠고기임자들이다. 로키 산맥을 중심으로 해발 5,000피트-7,000피트 고지대에서 방목하는 검은 소들을, 미국에서 제일 맛있는 고기로 쳐준다나. 해발이 높아짐에 따라 연이어 나타나던 검은 소 대신에 검은 말들 일색으로 바뀐다.


길은 자꾸 높아지는지, 옛날 대관령 꼬부랑길은 명함도 못 내밀만치 지그재그가 심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지럽고 메스껍다. 생전 안하는 차멀미? 아니면 체했나? 퍼뜩 케이블카 타고 알프스정상에 올랐을 때 된통 혼났던 고산병이 상기됐다. 브라이스의 해발이 평균 8,000피트에서 9,000피트고, 3대 캐년과 유타국립공원들 중에서도 가장 고도가 높다니, 아무래도 산악병 증세다. 그래도 70대인 언니 두 분과 다른 친구들은 멀쩡한데, 멀미파인 박과 나만 맥을 못 춘다. 정이 기압차이로 풍선처럼 터질듯 팡팡 부풀어 오른 감자 칩 봉지를 보여준다. 그러고 보니 산소가 희박해 혈관이 팽창했는지 발과 종아리도 탱탱 부었다. 전연 예견치 못했던 상황이라 대비책도 없다. 여행의 기록은 몸에 새겨지는 거라고도 하지만, 정말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다.

길가 마을 옆에 삼각뿔형의 아파치 전통천막인 티피가 옹기종기 있다. 인디안 거주지 같진 않은데 했더니, 관광객대여용이란다. 일테면 인디안 표 방갈로겠다. 학교에서 에스키모의 이글루를 배웠을 때 꼭 한번 자보고 싶었듯, 티피도 묵어보고 싶다.

점차 심해지는 울렁거림 때문에 고전하다가, 가까스로, 한라산보다 높고 백두산보다 낮다는 브라이스에 무사히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렸어도 머리 띵한 건 여전하다. 허긴 고산병의 약은 ‘하산’이란 처방밖에 없으니까. 다행히 무공해지역이라, 심호흡을 자꾸 하니 느글거림은 좀 가라앉았다. 남들은 테이블에 둘러 앉아 소풍을 온 듯 비빔밥도시락을 먹는데, 구토증이 겁나 멀거니 구경만 했다. 다들 나보고 쉬라지만 기를 쓰고 전망대로 가는 일행을 뒤쫓았다. ‘유명코스를 답사만한 여행은 필기한 노트처럼 잃어버리면 그만이고, 스스로 발견하고 느끼고 즐겨야, 비로소 여행이 내 것이 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도 기필코 찬찬히 눈에다 담고 촘촘히 가슴에다 새길 것이니까.

서부대륙의 지층이 23개 층인데 맨 밑에서 13층까지가 그랜드 캐년이고, 13번째에서 20층까지의 중간이 자이언 캐년, 제일 나중 시대로 20층서부터 위층까지가 브라이스 캐년이란다. 이 브라이스 캐년은 단단한 사암이 되기 전의 상태, 즉 흙과 바위의 중간정도지형지물인 후드(Food:바위기둥)들의 퍼레이드다.

전망대는 브라이스 포인트, 레인보우 포인트, 선 셋 포인트 등 9개의 공식 포인트가 있다. 봄, 가을의 풍광이 더 좋고 특히나 일출 일몰시엔 신비의 극치란다. 선 셋 포인트로 가니 바로 벼랑 끝이다. 거대한 계단식 원형분지와 깎아지른 절벽들, 색색의 첨탑들이 눈을 확 사로잡는다. 지상에서 유일무이한, 나로선 생전 처음 마주한 신비스런 경관에 숨이 콱 막힌다. ‘무언가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것은 새롭게 숨 쉬는 일이며, 마음이 맑아지는 순간’이라더니 머리도 점차 맑아져서 살 것 같다.

애초 바다였던 바닥에 토사가 쌓여서 형성된 암석들이 지가변동으로 솟은 후, 수 억 년 동안 비, 바람, 공기, 물의 영향으로 깎여진 자연조각품들이란다. 여름에 약산성 비가 내리면 석회석(Lime Stone)을 녹이는데, 오랜 세월에 걸쳐 깎여나가면서 일자형태의 후드로 된 거였다. 그렇게 후드가 만들어지고, 석회암이 사라지면서 여러 색깔로 채색된 자연의 벽화암벽이 된 거였다.

요컨대 붉은 색, 분홍, 황동색은 철의 성분, 녹색은 운모, 보라색은 망간이 노출돼, 광물의 산화작용부산물인 환상적인 파스텔 톤의 색깔들이 암석 속에 섞인 거였다. 별나라의 은밀한 세상이 이럴까? 기이하고 몽환적인 미의 극치다. 나로선 어떤 말과 글, 그림으로도 묘사불가인, 이른바 비색의 첨탑궁전이다. 바위도 세월과 비바람에 깎이면, 이렇게 꽃보다 더 예쁘고 화사할 수 있는 거였다.


어떤 첨탑은 아주 작거나 가녀린 버팀 석 위에 엄청나게 큰 바위가 의젓이 폼 잡고 있다. 남실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추락할 듯 아슬아슬 물구나무서기다. 상식적으론 도저히 이해불능의 균형 감각이다. 척 보는 순간, 딱 영화 의 나라에 온 느낌이 확 온다. 수천 년의 세월에 조각되어진 가느다란 첨탑들도 있다. 성애가 유리창에다 그려 놓는 성이 떠오르고 수정 광산이 이럴까싶다.

첨탑들마다 정원의 석등이고 등산용 램프나 서양장기 말 같다. 양산이나 넓은 챙 모자를 쓴 바위도 있다. 여하튼 각자 떠오르는 이미지대로 갖다 붙이면 다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만물상이다. 이런 아류의 첨탑들이 도토리 키 재기 하듯 겹겹으로 둘러섰으니 십만 이천봉도 넘겠다. 진짜 무릉도원은 아마도 땅속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에 바닷물이 다 증발해버린다면 드러나는 산호초세계가 이럴까?

아무려나 큰 시야로 본전체적인 인상은, 장대한 바위들이 줄무늬 블라우스에다 붉고 하얀 치마를 입은 양상이랄까. 얼핏 색동저고리도 머리를 스친다. 더한 건, 그런 주상절리의 바위 군들마다 작은 나무들이 그린 색 바늘인양 박혀 사암의 붉은 색감을 살려주고 있는 거다. 영상미의 결정체다. 브라이스를 두고 왜 여성적이라고들 하는지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유감인 건, 앞으론 이 순간과 똑같은 모습은 절대 볼 수 없다는 거다. 긁으면 빨간 가루가 나오는 돌로 굳어지기 직전의 사암들이라, 꼭대기부분의 작은 돌이나 모래가 비바람에 조금씩 움직이는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임 동전의 굵기만큼씩 움직여, 50년 주기로 넓이가 30cm씩 넓어져가고 있단다. 자세히 보니 모래가 흘러내린 자국들이 있다.

‘행성도착’ 기념사진을 찍는데, 안이 쓴 모자가 바람 따라 휙 투신했다. 요행히 천야만야한 낭떠러지대신 아래 트레일 언덕에 안착했다. 먼 곳의 딸이 보내준, 의미 깃든 모자인 걸 알기에 급히 트레일 쪽으로 뛰었다. 그때 아래 트레일 에서 웬 여자가 모자를 주워갖고 올라간다는 손짓을 했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낯선 여행객들끼린, 묘한 동료의식이 흘러 스스럼없이 도움을 주고받게 된다. 그래도 진심이 담겨진 순수한 친절이 마음 곱게 와 닿는다.

제일 높다는 레인보우전망대로 갔다. 양쪽의 절벽바위 사이로 베란다처럼 앞으로 쑥 뻗어나간 큰 선반바위가 있다. 반 이상은 허공에 뜬 바위라 중간에 허리 높이로 통나무 안전펜스가 있다. 오른 편의 웅대한 바위가 화산성으로 벌집처럼 구멍이 송송 뚫렸다. Bank Swallow라는 작은 바다제비들이 바닷가 흙 벼랑에다 뽕뽕 뚫어놓은 집들과 똑같다.

여기도 그 새가 있나 반가워서 휙휙 둘러보다가 안의 모자를 건드렸다. 오늘은 모자가 주인과 작별할 작정임에도 ‘그래도 못 다한 말’이 남았나. 신통하게도 펜스 밖의 선반바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바람이 밀어버리기 전에 주우려고 급히 펜스에 발을 올리는데, 앞에 있던 소년이 바람처럼 넘어가 주워온다.

노년 배들 보단 자기의 담력이 크다는 이해타산 없는 기특한 배려겠다. 생면부지 타인들로부터 연이어 따끈한 마음의 온기를 받고 보니 기분 좋다. 일본의 할머니 시인 시바타 도요 씨의 시<저금>처럼, 두고두고 상기될 인간의 아름다움들이다.
난 말이지/사람들이/친절을 베풀면/마음에 저금을 해둬/쓸쓸할 때면/그걸 꺼내/기운을 차리지//너도 지금부터/ 모아 두렴/ 연금 보다/좋단다.

이제 브라이스에서 85마일 떨어진 브라이스보다 두 배나 넓은 자이언으로 향한다. 고대 인디언들이 ‘지구의 중심’이라고 일컬었던 신비의 땅이다. 콜로라도 고원 서쪽 끝의 대분지 사막과 모하비 사막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다.

유타 주의 서남쪽 끝과 네바다 주와 애리조나 주가 삼각형을 이룬 독특한 지형이다. 1924년 국립공원 지정, 유타 주의 5대 국립공원 중 방문객이 최다인 곳. 입구가 동쪽과 서쪽 두 군데인데 대부분 서쪽진입을 택한다. 파크의 남부는 낮은 사막지역으로 콜로라도 강의 지류인 버진(Virgin)강이 흐른다. 북쪽은 높은 고원이라 다채로운 색의 봉우리들을 품은 평평한 산들이고.

브라이스는 위에서 내려다 본 조망이었지만 자이언은 직접 속살을 관통하는 거라 체감이 짙다. 척 봐도 태초의 비경이 고스란히 간직된 자연의 날 것 그대로의 국립공원감이다. 주립공원들과는 급과 격이 다르다.

버진 강이 오랜 세월 고원을 침식해 만든 작품인 Zion Narrow는 하나님의 처소라 할 만큼 비경중의 비경이란다. 미 전국 수 십 만개 트레일 중 랭킹 10위안에 드는 16마일에 걸친 협곡이란다. 사구의 화산분화로 생성된 절벽들과 바위 돔의 절경을 탐색하려면, 사진작가처럼 기꺼이 발품을 팔아야하는데, 버스 안에서 잠간씩 스쳐가며 엿볼밖에 없다. 둔치마다 사시나무인 Aspen과 회양목외에도 내가 사랑하는 미루나무들이 섞여있어 반갑다.

갈수록 우람하고 범상한 암 봉들이 나타나면서 소나무가 많아진다. 각양각색의 모래바위들과 사막, 수풀 고원이다. 분홍색, 흰색, 오렌지색의 호쾌한 통 바위와 준봉들의 화려함은 압권이다. 5,6층 건물 높이는 됨직한 장대한 화성암들이 계곡의 숲과 어우러져, ‘신의 궁전’소리들을 자격이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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