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명의 존엄(尊嚴)

2014-04-2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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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 (아동문학가/ 목사)

뉴저지 주 플랭클린 레이크스에 사는 랠리 그로긴 씨는 지난 주 월요일에 있었던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그 전날인 4월13일에 뉴저지를 출발, 보스턴까지 235마일을 달렸다. 마라톤을 함께 하는 친구와 둘이었으며 부인이 차로 따라가면서 음료와 음식을 제공하였다.

그는 작년에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했다가 폭탄 테러로 중단되고 그 한을 풀 겸 금년에는 아예 뉴저지부터 뛰기를 시작하였다. 그의 이런 모험은 단순히 마라톤 취미 때문이 아니라 배우 폴 뉴먼이 창립한 장애아동 재활재단인 ‘홀 인더 월’(Hole in the Wall)이 도와주고 있는 장애아들의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금년에도 그는 10만 달러를 모금하여 헌납하였다.


생명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신의 선물이다. 독재자 히틀러는 지능지체아(The Retarded Children)를 비생산적인 소모자라고 보고 안락사 시켰으나 불치병 환자의 생명도 심신장애자의 생명도 신이 창조한 존엄한 생명이다.
생명은 아름답다. 갓난아기의 생명도, 못생긴 사람의 생명도, 피부가 검은 사람의 생명도 똑같이 아름답다. 생명 속에는 성장의 신비가 있고, 기회의 샘이 있으며,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아무도 그 행복과 기회와 성장을 뺏거나 방해할 권리가 없다.

예수는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이라고 선언하여 인간의 생명이 전 세계 물질의 총화(總和) 보다 더 값짐을 말씀 하셨다.그러므로 존귀한 생명체인 인간은 이데올로기의 종이 되거나 정권의 시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기업주의 생산수단이나 소위 경제 발전의 도구 이상의 귀중한 생명체이다. 존엄한 생명이 핵진(核塵)이나 화학약품의 찌꺼기가 되어서도 안 된다.

복지사회란 생명을 아끼고 보호하고 행복하게 성장시키는 사회이며, 이토록 귀중한 생명을 잘 간수하기 위하여 교육 경제 정치 종교 등 지구촌의 유대와 노력이 있는 것이다.

생명의 존엄이라는 튼튼한 기초 위에 민주주의도 가능하고, 천국운동도 그 의미가 확실해진다. 아름다운 생명, 귀중한 생명을 인식한다면 이 세상도 꽤 살만 하며 오늘의 땀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하나님이 내신 생명의 존귀를 믿는 기독교는 생명을 아끼고 보존하는 운동에 적극 참가하여야 한다. 성차별(여성 경시), 계급차별(경제적 계층에 의한 차별), 인종차별, 학벌차별, 가문차별 등은 예수의 해석에 의하면(마태5:21-24) 살인 행위와 같은 것이다.

진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비극이 뉴스의 초점이 되어있다. 파선된 여객선과 수많은 생명의 수장(水葬), 남의 생명을 건지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준 의로운 여승무원, 제 목숨 건지고자 도의와 직무를 내버린 선장, 하나의 사건을 두고 생명을 다루는 많은 태도를 우리는 목도하였다.

생명을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하나님은 하나하나의 생명을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게 하셨다. 나의 생명도 남의 생명도 우연히 생겼다가 자연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존귀한 생명을 내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생명은 모험이다. 용감하게 그 바다로 출범하라. 생명은 의무이다. 기쁘게 그 짐을 저라. 생명은 신비이다. 그 의미를 풀도록 진지하게 사색하고 공부하라. 생명은 기회이다. 지나가기 전에 잘 사용하라. 생명은 아름다움이다. 마음껏 찬미하라. 생명은 투쟁이다. 후퇴하지 말고 싸우라.

예수는 자기를 증거 할 때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4:6)고 선언하셨다. 예수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생수라고도 부르고, 생명의 빵이라고 하였다. 예수에 대한 표현에는 언제나 생명이 따라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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