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

2014-04-1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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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16일 인천을 떠나 제주로 가던 여객선 세월호가 큰 충격으로 배가 파손되면서 전남 진도 앞바다에 침몰한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뉴욕과 뉴저지의 한인들은 참사 소식에 다들 일을 제대로 못할 정도로 뉴스 등을 통해 시시각각 들려오는 구조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승객과 선원 475명 중 사고 후 31시간이 지난 현재시각으로 179명 구조, 사망 25명, 실종 271명이라 한다. 실종자 대부분이 선박 내부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살아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승객 중에는 수학여행을 가는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이 있었다. 그런데 17일 오전 11시까지 구조된 안산 단원고 학생은 325명 중 76명, 승무원은 29명 중 20명이라 한다. 총 책임자인 선장과 기관장은 가장 먼저 구명보트에 탔다고 하고 승객의 탈출을 도운 뒤 숨진 정규직 아닌 알바생 22살 박지영씨외 다른 승무원들은 사고발생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침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다른 사람을 구한 것은 탑승객들이었다. 탑승객 김홍경(58)씨는 배가 기울어지던 30여분 동안 주위의 젊은 사람들과 합세하여 소방호스와 커튼을 묶어 1층의 학생 20명을 위층 난간으로 올려줬고 이들은 해경 헬리콥터로 구조됐다.
여객선 세월호 사고가 난 날은 타이태닉호 침몰 102주년 이틀 후였다. 타이태닉호는 1912년 4월 10일 승객 2,200명을 태우고 영국의 사우샘프턴을 떠나 뉴욕으로 가던 중 4월 14일 오후 11시40분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했고 1,514명이 사망했다.

사고 100년이 넘었어도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갈 때, 유람선을 탈 때 늘 마음 한구석에는 타이태닉호를 떠올리곤 한다. 그런데 그 배의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은 어떠했는가.

숨 가쁜 대피와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여자와 어린이를 먼저 태우게 했고 마지막 구명보트가 떠나자 선장은 그제서야 선원들에게 제 살 길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선장은 배와 함께 북대서양 바다에 수장됐고 배의 설계자 토마스 앤드류스도 승객들의 구명보트 탑승을 돕다가 흡연실로 들어가 구명조끼를 벗은 채 그림을 응시하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고 한다.

배와 함께 남은 사람 중에는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이 있다. 그는 구명조끼를 벗고 턱시도를 갈아입고 ‘신사답게 죽겠다’고 했고 그의 딸 페기 구겐하임은 물려받은 유산으로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의 초석을 쌓았다. 또 메이시 백화점 소유자 스트라우스 노부부도 구명보트 승선 제안을 거절하고 모피코트를 하녀에게 입혀 보트에 태운 뒤 바닷물이 들어오는 선실침대에서 둘이 껴안고 죽었다.

죽는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고해성사를 집전한 토마스 바일스 신부, 윌리스 하틀리를 비롯 바이얼린 연주자들은 배가 침몰하기 직전까지 찬송가를 연주하여 승객들을 위로한 뒤 전원이 사망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릿이 나오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1997년 영화 ‘타이타닉’에 나오는 모습 그대로 이들은 영화처럼, 소설처럼, 남을 돕다가 초연한 자세로 죽음을 맞는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이번 여객선 침몰사건을 보면서 우리들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어떨까를 유추해 본다. 하나뿐인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살려 달라 애원하고 자신의 생명 보전을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을까, 경계에 선 자들의 선택은 언제나 어렵다. 사는 동안 그런 선택을 요구받지 않고 평범하게, 무난하게 살아가기를 기원하지만 앞날이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절대절명 위기에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자신의 자리에 대한 책임감, 원칙이다. 선장의 책무는 위급상황에서 마지막까지 승객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사고가 나면 선장은 끝까지 남아 전체 지휘를 하고 승무원은 각자 정해진 위치에서 구명보트를 내리고 승객들에게 안전한 도피처를 안내해야 한다.
이번 진도 여객선 사고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타이타닉호가 참담하지만 아름다운 비극으로 여겨지는 것은 마지막까지 배에 남아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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