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간은 한조각 본토의 일부”

2014-03-1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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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주필)

인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비문에서 찾는다고 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 한 비문에는 지금도 그 당시 노예들의 실상이 얼마나 참혹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주인이 죽으면 마치 그가 소유하던 귀한 물건을 가져가듯 부리던 노예도 함께 매장되곤 했다. 그래서 노예는 살아있는 연장, 살아있는 송장이라 부르고 있었다.”
어쩌다 노예가 도망치다 잡히면 눈썹위에 또 한 번 낙인이 찍히면서 계속 감시자가 따라붙고 붙잡힌 노예는 또 다른 노예들과 함께 나무멍에에 묶여 한 노예가 쓰러지면 또 다른 노예도 쓰러지고, 또 하나가 일어나면 묶여 있던 노예도 같이 일어나야 하는 고통을 짊어져야 한다. 마음대로 눕지도 앉지도 다리를 펴지도 못하는 신세이다.

노예의 이런 비참한 실상은 그 옛날 고대로부터 1963년 미국 에이브러햄 링컨대통령의 노예해방 선언이 있기까지 줄곧 이어져 왔다. ‘세상은 힘(돈이나 권력)이 곧 정의(power is justice)다’ 라고 한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말처럼 세상은 언제나 힘 있는 자에 의해 지배돼 왔기 때문이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영국의 흑인감독 스티브 맥퀸의 영화 ‘12년 노예(12Years a Slave)’는 지배자가 노예에게 저지른 비인간적 야만성을 폭로하며 인권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부각시켰다. 영화는 자유인 흑인 솔로몬 노섭이 납치돼 노예로 팔려가 12년간 온갖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극적으로 구출되는 자전적 실화다.

신대륙 발견 이래 미국에 지속돼온 노예제도를 만약 링컨대통령이 종식시키지 않았다면 그 참상은 여전히 고리를 끊지 못하고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또 버스에서 백인에게 앉아있던 자리를 내주라는 운전기사의 지시를 거부한 흑인 로사 파크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투쟁이 아니었다면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이렇게 마음 편히 살 수 있었을까. 흑인과 백인아이가 함께 어우러져 노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한 킹 목사의 꿈은 이제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흑인에 대한 백인의 차별은 여전히 구석구석 남아 있다.

5년 전 하버드대학 흑인교수 헨리 루이스 게이츠가 자신의 집 대문을 강제로 열자 경찰이 무단침입으로 체포해 문제가 되자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으로 불러 공개적으로 갈등을 푼 일이라던가, 백인경찰이 흑인을 무차별 구타해 문제가 되곤 하는 사건들이 그것이다. 최근에는 미 명문대 하버드에서 흑인학생들이 집단으로 SNS를 통해 “흑인이 읽을 줄이나 알아?” 등 학내에서 백인학생들로 부터 당한 인종차별 편견에 항의하는 사진을 올려 파문이 일고 있다.

백인들의 차별행위는 소수민족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한인들도 곳곳에서 보이지 않게 백인들로부터 ‘칭 총(ching chong)’ ‘찢어진 눈(lady chinky eyes)’ 등의 비속어로 인종적인 모욕을 당하는 사례도 없지 않다. 그래도 그 옛날에 비하면 엄청나게 달라진 건 사실이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디오게네스는 “장미는 양파에서 피지 않는다”고 하였다. 자유인은 노예에서 나올 수 없고, 노예에서는 자유인이 나올 수 없다고 했지만 이제는 흑인이 세계 최강국 미국을 이끄는 대통령이 될 정도로 양파 밭에서도 장미가 피는 시대다. 다인종, 다문화 속에서 200여개 민족이 하나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공존의 시대에 우리는 지금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한 핏줄인 북한동족의 인권이다. 북한의 동족 2,000여만 명은 지금도 김정은 일인독재 하에서 마음대로 말을 못하고 행동도 자유롭게 하지 못하며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상태로 산 연장이나 산 송장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다. 하루속히 그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남한은 물론, 세계가 앞장서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들이 누릴 자유와 권리를 박탈 할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인이다.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의 말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조각 본토의 일부이다.”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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