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전통의 두께

2014-03-10 (월)
크게 작게
허병렬(교육가)

“선생님, 질문이 있습니다.” 교사의 눈이 그 쪽으로 쏠리자 “지금 밖에서 들려오는 데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사는 잠깐 생각하더니 “학생, 지금은 서양사 시간이고, 밖의 데모는 동양사, 아니 한국사 관계 사건이지 않아?” 그러니까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재빨리 발휘되는 재치는 어디서 왔을까.

이런 일 말고도 즉각적인 판단인 어려운 경우가 허다하다. 그때마다 생각하는 경로가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같은 전통을 가진 집단의 사람들이다. 이처럼 전통이란 소리 없이 스며드는 공기이다. 가리기 어려운 일을 당해 쉽게 내릴 판단에 따랐다가 의외의 결과를 맞게 되는 경우에 전통을 따르지 않았음을 안다.
“이 요리가 어느 나라 것이지요?” 이때의 답은 맛에 달렸다. “이 꽃의 원산지가 어디지요?” 이때의 답은 꽃의 아름다움에 달렸다. “누가 이렇게 훌륭한 자녀를 키우셨을까?” 이때의 답은 그 자녀의 사람됨에 달렸다. “이 음악의 작곡자는 누구지요?” 이때의 답은 그 음악의 아름다움에 달렸다. 미술전람회에서 “이 작품들이 회화인가요? 아니면 조각인가요?” 이때의 답은 그 작품의 창의성에 달렸다. 미술은 시각을 통해 감상할 수 있도록 공간 속에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을 말한다는 것이 사전적 해석이다.


앞에 예거한 각종 판단은 무엇에 영향을 받는가.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 작품의 분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철학적인 배경과, 창의성의 결합이 그 값어치를 말한다. 미술작품은 과거˙현재˙미래를 포함하는 착상이 시각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이번에 관람한 ‘전통의 두께(Strata of Time: the layers of tradition) 전시회는 참가 작가들의 작품에서 오랜 전통의 부피를 느끼게 하였다. 작품의 철학, 표현 형식, 작품의 무게, 쌓인 역사의 승화된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거의 모든 작품이 평면을 벗어난 입체였다. 오래된 가죽에 찻물을 여러 번 입혀, 그 속에 시간과 삶의 흔적을 겹겹이 그린 ‘원’ 시리즈는 작가 천세련 작품이다. 박상준 작가는 한국 전통 도예기법과 서양의 도예기법 그리고 현대 조각의 아방가르드한 면면을 진지하게 연구한 작품을 전시하였다. 한국의 전통적인 한지공예에서 영감을 받아 독특한 작품을 창작한 정지영 작가의 존재도 뚜렷하다. 금속공예를 전공하는 조봉상 작가의 한국적인 장식미술 또한 전통예술의 아름다운 두께를 보여준다.

이들은 귀한 예술인이다. 한국의 전통을 푹 녹여서 현대감각으로 표현하려는 의욕과 창의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작품에는 한국전통이 조용히 숨 쉬며 개성미를 발휘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성장하는가. 부모에게서 받은 DNA와 교육, 그리고 민족이 가진 전통적인 환경이 이를 돕는다. 그러나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은 전통적인 환경이다. 환경의 중요함을 알고 있더라도, 전통적인 환경이라는 바른 인식이 희미하다. 하지만 그 영향력이 자못 크다. 전통은 조용히 전반적인 생활에 독특한 색채를 준다. 우리들의 생각하는 방향, 일을 처리하는 모습, 자녀교육 방법,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 등 모든 일에 나타나는 우리의 공통성에 특색이 있다. 그게 바로 전통의 영향이다.

한국의 전통은 반만년의 긴 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사상, 관습, 행동 따위의 양식 또는 그것의 핵심을 이루는 정신이 이어져 왔다. 우리들이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온몸에 배어 있다. 동양인들을 여럿 만나도 한국인을 구별할 수 있는 이유이다.

전통은 정신적인 재산이다. 조상들이 남긴 유형˙무형의 유산이다. 우리의 생활주변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더라도 그 저변에서 건강하게 호흡하는 것은 전통이다. 전통의 바탕 위에 새로운 변화가 건설된다. ‘전통의 두께’ 미술전에서 재확인한 전통의 귀중함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