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운명 교향곡

2014-03-0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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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영(목사)

버몬트 주로 시집간 어느 팔자 좋은 한국 여성은 눈 내리는 설경에 도취되어 엉엉 울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이번 눈 폭탄으로 렌트비도 못 내고 우는 한인들도 많다하니, 눈이라고 다 같은 눈은 아닌가 보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인들 어디 예외일까. 어디 간들 편히 쉴 곳 없고 광야의 찬바람, 눈보라 맞으며 사람의 힘으로는 피할 수 없다는 운명에 갇혀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때로는 벗어나고파 몸부림치며 운명의 문을 두들긴다.

“내 팔자는 왜 이런가?” “빵을 사기 위해 작곡해야 하다니!” “내 귀가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니” 이런 무참하고 가혹한 운명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운명의 문짝을 부서트리듯 ‘탕탕탕, 탕!’ 두들기는 소리가 운명 교향곡의 주제가 됐다고 말하는 사람이 잇는가 하면, 혹자는 ‘인간의 심장박동 소리의 표현이다’는 등 추측들이 난무한다. 안타깝게도 베토벤 전기를 쓴 ‘로맹 롤랑’도 이 부분에는 입을 다물고 있는데, 그러나 필자의 지론은 조금 다르다.


베토벤은 운명 교향곡을 작곡하기 전 1804년,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예수 그리스도’를 발표한다. 이 말은 즉 베토벤이 감람산에서 운명으로 고민하고 있는 예수를 만났다는 알리바이가 성립된다. 예수는 그의 운명을 아버지께 맡겼는데 그것이 곧 십자가로 연결되고 천재 베토벤의 귀속에서는 이미 예수의 손과 발에 못 박는 ‘탕탕탕, 탕!’하는 소리도 들려왔을 것이다. 이 소리는 분명, 죽음의 총소리같이 들렸지만 곧 ‘부활과 승리’의 소리로 바뀔 것을 그는 확신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베토벤은 운명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풀려는 성질 급한 동성이명의 베드로를 만나보고 실망했을 뿐만 아니라 운명을 피해 옷을 벗어 던지고 도망치는 제자들의 추태라든지, 이런저런 것들이 베토벤으로 하여금 ‘운명 교향곡’을 성공케 한 소재가 아니었나 하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이러한 기구한 운명의 사나이가 쓴 작품이 ‘운명 교향곡’이다.

올해 뉴욕의 따가운 겨울처럼 눈보라치는 1807년 독일 겨울의 밤 불거진 난로가에서 피아노를 치지만 귀엔 들리지 않고 청천벽력 그토록 사랑했던 연인으로부터 온 실연의 편지를 움켜쥐고 하염없는 눈물로 오선지를 적셨을 것이다. 이 가엾은 영혼이 운명과의 진흙탕 속의 싸움 끝에 ‘운명 교향곡’을 탈고하면서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있다. “이 곡은 불행한 사람들과 가련한 인류를 위해 쓴 것이다”고 중얼거린 것이다.

이 말이, 이번 폭설로 렌트비도 못내는 플러싱 사람들뿐만 아니라 불경기로 울상 짓는 맨하탄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또 건강을 잃고 신음하는 불행한 한국 사람들, 모두의 가슴에 ‘탕 탕탕, 탕!’ 두들겨 주어, 예수가 부활하듯 다시금 일어서길 베토벤과 같이 중얼거려 본다.“Durch Leiden Freude!" 괴로움을 돌파하여 기쁨으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며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계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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