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환난 속에서

2014-02-1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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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 (아동문학가/ 목사)

금년은 인류가 눈 폭탄을 맞았다. 뉴욕, 뉴저지뿐이 아니라 한국과 유럽도 눈에 덮여 자연이 가져온 대 환난과 싸웠다. 뉴욕 주는 제설작업에 7,000만 달러를 썼다.

구약에 나오는 욥은 하루 밤 사이에 태풍에 의해 자식들이 몰살되는 비극을 맞으나 신앙으로 극복한다. 실상 성경인물 이야기의 전체는 ‘고통을 어떻게 신앙으로 극복하였느냐?’ 하는 인류의 공통문제에 대한 해답들이다. 이스라엘의 소녀 작가가 나치 통치 시절 다락에 숨어 살던 체험을 쓴 명작 ‘안네의 일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드디어 숨어있던 은신처가 발각되어 게슈타포가 문을 부수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을 때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가족들에게 조용히 말한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공포 속에 살아왔으나 지금부터는 희망을 품고 살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게슈타포는 인간이 겪는 환난으로 상징한다. 고통을 앞에 두고 기다릴 때는 두려움의 포로가 된다. 그러나 게슈타포의 손에 들어가면서부터 좋은 미래를 향한 해방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희망은 고통 속에서 움튼다. 에델바이스는 봄이 되기 전에 차가운 눈 속에서 이미 꽃을 피운다. 폭풍이 올 때 닭은 자신의 날개 속에 얼굴을 파묻지만 독수리는 날개를 펴고 그 바람을 타고 안전한 곳으로 날아간다.

흔히 사람들은 고통의 해결책을 외부에서 찾지만 사실은 고통과의 용감한 투쟁 속에 해결에 이르는 방법이 있다. “아플 때는 잘 앓아야 한다.”는 말처럼 고통과 환난을 지긋이 씹어보는 인내의 맛을 터득 할 때 비로소 고통이 극복된다. 괴로울 때면 ‘기다리는 예술’을 배워야 한다.

기다림이란 여유 있는 마음이다. 한 가지에 붙들려 속상해 하지 말고 다른 길도 있다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성경에 이런 멋진 말이 나온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프린스턴 대학의 은퇴교수 조지 헨드리 박사는 학생들에게 “청년이여 저항을 감수하라!”는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저항은 피할 것이 아니라 감수해야 한다. 저항이 자극을, 자극이 소망을, 소망이 행복을 낳기 때문이다.

네트 없이 테니스를 치면 저항은 없지만 재미가 사라질 것이다. 케이블카를 타는 것보다 비탈길이 있기에 등산의 의미가 있다. 쉽게 살겠다는 말은 불행하게 살겠다는 말과 큰 차이가 없다. 인생이란 나그네 길에 꼭 필요한 두 가지 장비는 희망의 지팡이와 인내의 신발이다.

경제학 교수 카인 클리슨 박사는 ‘재해경제(Economics of Disasters)’란 말을 썼다. 대 재난 뒤에 경제가 좋아진다는 이론이다. 1단계는 손실의 기간, 2단계는 간접 손실의 시기로서 실업 증대와 여가 활동이 위축된다. 그러나 반드시 3단계가 온다. 회복과 재건의 기운을 타고 돈이 풀리며 고용이 증가하고, 소매 거래가 활발해진다. 건축자재에서 식품까지 모든 품목에서 매매가 활성화한다. 그러니 장기적으로 보면 재난을 당한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나의 부친은 냉수마찰을 하시는 습관이 있어 추운 겨울 아침에도 웃통을 벗어젖히고 “찬 맛이 좋다.”고 하시던 것을 기억한다. 찬 맛의 경험은 온상의 체험보다 귀중하다. 가끔 길에서 Detour 표지를 본다. 돌아가라는 뜻이다. 돌아가는 것은 싫지만 그래도 목적지에 빨리 가려면 돌아가야 한다. 건강 상실, 사업실패, 재난, 실직 등은 잠깐 돌아가라는 푯말로 보면 된다.

예수도 “좁은 길로 가라. 넓은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다.”고 하셨다.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다.”는 서양 속담이 있다. 춥기 때문에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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