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소리 없는 세월 속에서

2013-12-1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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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한 해가 소리 없이 왔다가 또 소리 없이 사라진다. 한 해를 살았지만 그 한 해가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다. 있거나 있다 하면 남기고 가는 것은 망각뿐이다. 그렇다. 나이가 많이 드니 알던 이름들이 머릿속에서 나올 듯 나올 듯 하면서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망각이고, 나이 들어 생기는 망각증세다. 더욱이 뭘 하다가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건망증 증세는 나를 심하게 슬프게 한다. 이 모든 것이 세월 탓이고 세월에 씻겨가는 나이 탓이다.

‘세월이가면’이란 시가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노래로도 유명한 이 시는 내가 중학교를 다니면서 한 가마의 그리움 덩어리였던 시인들을 따라다니며 잔심부름을 기쁘게 하던 시절, 활달한 할머니가 운영하던 명동의 왕대포 포장마차에서 독한 밀주(?)에 취해 박인환 선생이 즉석에서 지은 시였다.


여기에 동석하고 있었던 김진섭 선생이 즉석에서 곡을 부쳤고 그 즉석 곡을 가수 나애심씨가 거기에서 처음 흥얼거리며 불렀던 시였다. 그때 나는 그들이 황홀의 대상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잊었고 또한 계속 잊혀져가고 있지만 지금도 그 때의 그 눈동자, 그 얼굴, 그 모습들이 그리움으로 고여 내 가슴을 그 우물에 진하게 비추면서 나를 흔들어 출렁이게 할 때가 많다. 세월은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생활이 거기에 있고, 만난 사람들이 거기에 있고, 사랑과 이별이 거기에 있고, 기쁘거나 슬픈 사연, 또한 고통의 사건들이 거기에 있어 자칫 세월이 어떤 형상을 지니고 있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한 해가 사라지는 세월을 만지작거리면서 눈을 떠 바라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개념 일 뿐이다.

시간이 소리 없이 달려가는 개념에 지나지 않으니 시간에 얹혀 이름표를 달고 가는 세월인들 소리가 있겠는가! 세월의 정의는 무형무성이며 시간의 정의는 진행일 뿐이다. 아는 것은 좋아 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 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지만 실은 이 모든 것 이 발견하는 것만 못하다. 시작은 발견에서 부터 출발하기에 찾으면서 인생을 만들어가기에 바빴다.

학문의 발견, 사랑의 발견, 우정의 발견, 경제의 발견, 권력의 발견, 의의 발견, 예술의 발견, 미학의 발견, 등등….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시간이란 진행의 테두리에서 직접성이 있는 형상을 만들어보려고 노력을 하다가 결국은 무형이란 허무한 이름을 남기고 사라지는 개념들이다.

변하지 않는 영원불변의 본질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없다” 없다는 것이 본질의 개념이기 때문에 세월이 많이 가면 사람은 세월 앞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그 무력이 슬프게도 바로 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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