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운명과 스마트 시대

2013-12-1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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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며 느끼며

크리스마스를 앞둔 이맘때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로맨틱코미디 영화 ‘세렌디피티(Serendipity, 우연한 행운, 2001)는 맨하탄 59가 렉싱턴 애비뉴의 블루밍데일 백화점 샤핑객들로부터 시작된다.

영국 여자 사라(케니드 베킨세일 분)와 조나단(존 쿠섹 분)이 각자의 연인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다 하나 남은 검정색 장갑을 동시에 잡게 되면서 얼마의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고 서로 첫눈에 반하게 된다.

하지만 운명의 계시를 믿는 여자는 자신이 지녔던 책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써서 헌 책방에, 남자가 지녔던 5달러짜리에는 남자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쓴 다음 델리에서 물건을 산다. 그 책과 지폐가 자신들에게 되돌아오는 행운을 믿어보기로 하는데 이 말도 안되는 일이 극적인 순간에 이뤄진다.


오스트리아와 파리, 그리스를 무대로 한 낭만의 ‘비포(Before Serese)’ 시리즈 영화도 있다. 남녀 주인공 제시((에단 호크 분)와 셀린느(줄리 델피 분)의 오래된 사랑 이야기로 올해 완결판인 ‘비포 미드나잇’도 나왔다.

‘비포 선 라이즈(1995)’는 유럽횡단열차에서 우연히 만난 제시와 셀린느가 비엔나에서 함께 내리고 밤새 걸어다니며 문학과 사랑,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강가에서 시를 짓는 거지를 만나고 까페도 가고 공원 잔디밭에서 레드와인을 마신 후 함께 잠든다. 6개월 후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이들은 못 만난다.

‘비포 선셋(2004)’은 그들의 9년후 파리에서의 만남이다. 셀린느와의 하룻밤 이야기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제시는 파리의 책방에서 작가와의 만남 행사를 열고 파리에 사는 셀린느가 이곳에 온다.

그들은 각자 살아온 삶을 이야기 하면서 서로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사랑을 확인한다.

이 운명과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는 지금 세대에 더 이상 공감을 주지 못한다. 전화 연락이 안되어 못 만나고 약속을 못 지키는 사정이 생기면서 오해를 하게 되고, 먼 세월을 돌아와 알게 되는, 그런 일들은 이젠 없다.

요즘 인기 있는 한국 TV드라마로 ‘응답하라 1994’가 있다. 신촌하숙집을 무대로 록카페, X세대, 오렌지족, 농구시합, 서태지와 아이들 등 그 시대의 추억을 건드리면서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 삐삐에 목숨 건 청춘들의 이야기다. 삐삐를 받으면 재빨리 공중전화로 달려가 녹음 내용을 확인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향수를 자극한다. 이 최첨단 전자기기가 발전, 지금은 스마트 시대가 되었다.

태평양을 앞에 두고도 카톡으로 실시간 대화를 나누고 그룹 채팅도 하고 전화 한통이면 위치추적까지 되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24시간 365일 네트워크에 매달려 있다.

2013년에 나온 영화 ‘디스커넥트’(Disconnect)에는 인터넷이 불러온 일상의 공포가 담겨있다. 채팅 사이트에 들어가 모르는 남자와 채팅을 하는 신디(폴라 패튼 분), 남편 데릭(알렉산더 스카스가드 분)은 온라인 포커게임을 하거나 이메일로 대출상담을 한다. 매일 인터넷을 사용하던 부부는 자신도 모르게 전재산을 피싱 당하고 누군가 바이러스를 심어 펀드를 빼가고 누군가 신용카드 번호와 신원을 도용해 대출까지 받아간다.


사이버 범죄를 다룬 이 영화는 누구나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일종의 경고일 뿐 사람들은 아무리 이같은 영화를 보았다고 해서 자신이 인터넷을 끊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이런 시대에 ‘만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난다’는 식의 운명적 사랑은 그야말로 하품 나는 스토리가 되고 있다. 요즘은 그리움이 없다. 기다림도 없다. 운명과 낭만은 백화점을 비롯 세계 시장 그 어디에도 살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가끔 블루밍데일 백화점 근처 영화 이름을 딴 레스토랑 ‘세렌디피티 3’에 가보고 싶다. 영화의 남녀주인공이 먹은 프로즌 핫 초콜릿을 맛보고 진눈깨비 내리는 날, 센트럴팍 울만 아이스 링크장에서 스케이트 타는 연인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아직 뉴욕에 낭만이 남아있음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민병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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