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희망의 인간

2013-12-0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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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상(전 언론인)

자고로 인생 순례자들은 모두 영국의 대법관이며 사상가 토마스 모어의 공상적 이상향 유토피아의 신기루를 좇고 있는 것 같다. 이 잡히지 않는, 좇아가면 좇아갈수록 멀어지는 신기루를 좇다 지쳐 기진맥진 쓰러져 숨진 사람이 부지기수이리라. 그러나 때로는 신기루 같은 이 환상적 환영이 잠시 현실로 나타나기도 한다. 물론 현실이란 것 자체가 일종의 환상이라면 환상이겠지만.

그 한 예로 아시아에서는 한반도가 그렇듯이 유럽에서는 폴란드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동-서로 갈린 양극 사이에 위치한 나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폴란드가 근년에 계속 뉴스의 초점이 되어온 것처럼 상반되는 양극 사이에서 고뇌하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영화 화면을 통해 사실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18회 부산영화제에서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바웬사, 희망의 인간>이 상영되었다. 지금으로부터 33년 전 같은 감독이 만든 <철의 인간>에 단역으로 출연한 바웬사는 33년 전 11월 스물 둘에 분신한 전태일과 달리 47세에 대통령까지 됐었다. 1943년생으로 올해 바웬사의 70회 생일을 맞아 만든 영화라고 한다.

1926년생인 바이다는 16세부터 레지스탕스로 70년을 오로지 저항 영화인으로 살아왔다. 30여년 간격으로 만들어진 이 두 영화는 둘 다 1980년 노동투쟁을 다뤘지만 이번 영화는 바웬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초등학교와 직업학교밖에 다니지 않아 읽은 책이 하나도 없다며 자신은 소위 지식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점이 너무도 신선하다.

1981년 칸느 영화제에서 수상한 <철의 인간>은 허구와 현실이 전적으로 통합된 ‘역사 그 자체’란 평을 얻었었다. 이 영화는 바이다 감독이 1976년 제작-감독한 영화 <대리석 인간>의 속편으로 2차 대전 직후의 낙관적 희망이 50년대 스탈린 공포시대를 겪고 냉소적인 부정-부패로 무산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40년대에 정부당국이 생산목표를 초과달성토록 노동자들을 독려키 위해 한 벽돌공을 ‘충격요원’ 모범 노동자로 뽑아 국민의 영웅으로 추켜 세워 이용한 후 그를 반동으로 몰아 그는 투옥되었다가 행방불명이 된다.

<대리석 인간>에서 이 벽돌공의 생애를 한 젊은 TV방송 여기자가 추적한다. 그리고 <철의 인간>이 이 스토리를 이어간다. 심층취재에 나선 이 여기자는 도처에서 침묵의 벽에 부닥친다.

그러다 실종된 노동자의 아들을 찾게 되고 방송국에선 해고되며 그 아들과 결혼한다. 여기자가 찾던 노동자영웅은 1970년 그디니아 의거 때 사살된 것을 알게 된다. 독학한 이상주의자였던 아버지와는 다른 배경과 견해를 갖고 아들은 그단스크 레닌 조선장 노조파업을 주도한다. 억압적 이데올로기를 고발하는 이 감동적인 영화는 예술과 역사를 통합한 걸작 명화로 길이 남을 것이다.
결국 이상은 추구하는데 그 의의가 있지 목적달성에 있는 것이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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