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조리의 영웅과 까뮈

2013-11-2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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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주필)

인간은 희망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정신이 남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을 멈추고 그 속에 직접 들어가려고 하는 데서부터 부조리가 시작된다.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땅이 나은 두 아들이다. 이 둘은 서로 떨어질 수 없이 공존하며 세상에 존재한다. 이것이 ‘부조리’의 정의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부조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쁨과 똑같은 관계에 있는 것이 슬픔이다. 장엄하고 긴 장례식 행렬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는 광경을 보라. 마차의 행렬은 그칠 줄 모른다. 그러나 마차 속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다. 죽은 자는 온 도시의 호위를 받아 묘지로 운반될 뿐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우정과 존경의 참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광경이다. 인간의 허식과 공허, 그리고 위선이 깔려 있다.”


우리는 알고 보면 허다한 부조리와 위선 속에 살고 있다. 이 부조리를 누구보다도 신랄하게 파헤치고 드러낸 인물이 바로 프랑스 국민이 제일 사랑하는 작가 알베르 까뮈(1013-1960)다. 올해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해 그의 작품에 진하게 녹아있는 그의 사상과 철학을 다시 되짚어 보는 바람이 불고 있다. 그가 새롭게 조명되는 것은 우리와 떼놓을래야 떼놓을 수 없는 인간의 부조리를 예리하게 분석한 인물이라는 점에서다. 소설 ‘이방인’과 ‘페스트’ 등 20여 작품으로 1957년 44세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는 작품 ‘시지프 신화’에서 우리 삶의 여정을 그대로 보여준 부조리의 영웅을 매우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시지프 신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시지프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자신이 죽으면 시체를 광장 한복판에 내버려달라고 하였다. 그가 죽자 그의 아내는 남편이 시키는 대로 시체를 광장에 내버렸다. 죽은 후 지옥에 떨어진 시지프는 인간적인 사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아내의 이 복종에 화가 나 아내를 벌하기 위해 지옥의 왕 플루톨에게 자신을 지상으로 내보내 달라고 하였다. 허락을 받고 지상에 나온 시지프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그만 아내에 대한 복수심과 지옥으로 되돌아갈 약속조차 잊고 말았다. 그는 여러 해동안 하구의 연안, 찬란한 바다, 그리고 대지의 미소를 즐기며 살았다.
지옥의 신들은 괘씸죄로 사자를 보내 그를 다시 잡아들여 혹독한 형벌을 내렸다. 거대한 바위를 산 정상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었다. 시지프는 명에 따라 죽어라고 그 큰 바위덩이를 비지땀을 흘리면서 정상에 올리지만 다 이르러서는 또 다시 굴러 떨어지는 고생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야 했다. 하지만 돌덩어리를 다시 올려야 하는 걱정을 하면서도 내려올 때는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인간의 본질과 삶의 모습 그대로이다. 우리 인간도 시지프와 같이 부조리 속에서 숱한 문제를 양산하고 또 그로 인해 허다한 사건과 사고의 연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믿은 아내의 마음을 시험해 보다가 이어지는 모든 현상들이 바로 우리 인간의 한평생 살아가는 삶의 여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과 같다. 이는 대부분 인간관계에서 오는 부조리와 같은 결과이다.

거대한 돌을 들어 산비탈로 수 백 번 굴려 올릴 때 나타나는 시지프의 이지러지듯 경련하는 얼굴, 바위에 짓눌려진 뺨, 진흙으로 덮인 바위덩이를 떠받치는 어깨, 바위덩어리를 고정시키려고 벌 벌 벌 떨며 버티는 다리, 다시 돌을 받아 안은 팔, 흙투성이가 된 두 손 등은 희망을 잃지 않고 도전하는 인간의 강한 의지와 연속된 고난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까뮈 탄생 100주년을 맞아 왜 그가 노벨상을 받고, 프랑스 국민이 그토록 그를 좋아하는지 그의 깊은 사상을 심취해보게 된다. 인간의 삶은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있고, 절망이 있으면 희망이 있는 법이다. 인간은 어차피 부조리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메시지대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 대로(大路)는 표류하는 배와 같아 왼쪽으로도 갈수 있고 오른쪽으로도 갈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과 성공의 길이 보이는 오른 쪽으로 가야 한다.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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