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놀이터가 비어있네

2013-11-1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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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예전에는 집을 지을 때엔 으레 집 안이던가 집 바깥에 마당을 마련하는데 현대식 집에는 마당이 별로 들어서지 않는다. 학교를 짓는 데에도 학교 앞에는 운동장이란 넓은 놀이터를 마련하는데 지금은 학교를 짓는 데에도 마당이 적다. 현대인들에게는 마당의 가치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마당의 씀씀이가 필요하지 않아서인가, 땅값이 비싸서인가 마당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마당! 햇빛 좋은 날, 시골 초가집 앞 넓은 마당에 아이들이 놀고 있지 않으면 그 동네는 힘없이 시들어 가는 동네로 보이고, 학교 운동장에 아이들이 뛰놀거나 시끌시끌 떠드는 소리가 흘러 넘치면 그 학교나 동네는 살아있는 활기가 넘치는 학교로 보이고 또한 동네로서 활기를 느끼게 된다. 조용하다. 놀이터가 조용하다. 한국의 놀이터도 비어있고 미국의 놀이터도 비어있다.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고 생활 방법이 전쟁을 치루는 형식이고 남을 견제하고 이겨야 살아남는다는 전쟁의 방식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그나마 아이들 주말 야구장으로 쓰인다던가 가끔 어른들이 조깅을 하는 공원으로 변해 놀이터로서의 명목을 간신히 유지하지만 한국에서의 놀이터는 모두 모래바람만 휘날리는 공터로 마을 구석에 번지는 땜통이 되어갔다. 개발업자들이 아파트를 짓겠다고 언제 덤벼들지도 모르는 놀이터, 놀이기구들이 흉물이 되어 동네사람들을 나무라고 있다.

사람은 놀아야 순수해지고 순수한 관계를 만들어 낸다. 그런 맑은 놀이터란 가지각색 사람을 모이게 하는 곳이고, 서로 다른 사람이라도 사람이 모이면 자연히 사귀게 되고, 사귀면 친구가 되고, 이미 친구가 된 사이라면 그 사이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 주는 곳이 놀이터이다.

가슴속에도 놀이터가 있다. 가슴속에 놀이터가 없거나 놀이터가 비면 연결고리가 점점 가늘어지고 어울리게 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산업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익의 목적을 품고 이웃을 바라보는 눈길은 놀이터에서 아무 목적 없이 여유만을 품고 남을 바라보는 눈빛과는 전혀 다르다. 놀이터에서 굴러다니는 눈빛은 사람이 그저 좋다는 깨끗한 눈빛일 뿐이다. 놀이터가 빈 마을, 놀이터가 비고 놀이터가 팽개쳐진 마을은 이웃의 관계가 날카로운 발톱이 감추어진 고양이의 발과 같다.

노래방이 놀이터가 아니고 술집이 놀이터가 아니다. 노래방에서 악을 쓰며 부르는 노래 속에 무슨 아련한 순수의 관계가 기다리고 있으며, 술김에 떠드는 드높은 목청 속에 무슨 맑고 진실하고 인간으로서의 아련한 호소가 있겠는가!
놀이터가 바뀌어야 하고 놀이의 방법이 바뀌어야 한다. 동네의 놀이터도, 가슴속의 놀이터도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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