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시대의 릴레이 선수들

2013-11-1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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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교육가)

한국의 빙상 스피드 선수 이상화는 500미터 스피드에서 올해도 어김없이 우승하였다. 정말 잘 했다. 또 여자들의 릴레이 레이스에서도 은상을 탔다. 정말 장하다. 빙상 스피드 경기에 관심이 있는 까닭은 내 자신이 스피드 스케이팅을 즐겼기 때문이다.

옛날 서울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것이 겨울의 한강 스케이트 링이다. 겨울의 추위가 한강의 결빙으로 나타나면, 거기에 길고 둥그런 링이 생겼다.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스케이팅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나는 큰 링을 돌고, 선친은 그 가운데서 피겨 스케이팅을 했다. 그럴 때는 반드시 주머니에 군고구마가 들어 있었고……. 요즈음은 한강물이 얼지도 않고, 여러 곳에 사계절 상설 스케이트 링이 있는 시대이다. 또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스케이트 링에서 피겨 스케이트만 타는 것 같다.


이 긴 설명은 릴레이 레이스의 중요함을 말하기 위해서다. 개인 경기와 달리 릴레이 레이스는 여러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첫째, 서로 마음을 맞춘다. 둘째, 각자의 실력이 어떤 수준에 도달한 것인지 체크한다. 서로 장단점을 보충할 장기를 가지고 있는가... 등등 전제 조건이 맞는 사람들이 팀을 짠다. 그리고 지혜롭게 맹렬히 연습을 한다. 적어도 이 정도의 계획이 없이는 이길 수 없는 것이 릴레이다.
그런데 우리는 의식하지 않지만, 모두 릴레이 선수인 것이다.

그게 무슨 종목이냐고? 각자가 태어나면서 가지게 되는 고유문화를 전승하는 릴레이 선수들이다. 역사는 현대와의 대화이고, 고유문화는 개인의 성장 영양소이다. 그 고유문화도 시대와 더불어 변화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성장과정이며, 문화가 틀림없는 생명체임을 말한다. 릴레이 선수들은 각자가 맡은 구간을 잘 달리고 나서 그 배턴을 다음 주자에게 넘겨주는 것이 맡은 임무이다.

우리는 고유문화 속에서 태어나, 고유문화 속에서 생활하다가, 그것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새 길을 떠난다. 그러니까 배턴을 꼭 쥐고 있다가 틀림없이 다음 주자에게 전해줄 임무를 띠고 있다. 만일 배턴을 떨어뜨리거나, 잃어버린다면 맡은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릴레이는 뜻이 있고, 즐겁고, 보람이 있지만, 한 구간을 맡은 선수의 책임이 더없이 크다.

배턴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릴레이 경주에서 주자가 가지고 뛰다가, 다음 주자에게 넘겨주는 짤막한 막대기다. 그런데 장거리를 뛰다보면 그 무게가 귀찮아서 멀리 내던져버리고 싶거나, 다른 사람 것과 바꿔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는 것이다. 또는 배턴의 길이나 색채를 바꿔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가능성도 있다. 이런 때 중요한 것은 배턴을 꼭 쥐고 있다면, 변형이나 변색은 그 시대와 그 지역에 맞추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본다. 중요한 일은 내 손에 배턴을 꼭 쥐고 있는 것이다.

한민족이 오천년의 역사를 가졌다는 것은, 대대로 배턴 터치가 잘 되었다는 뜻이다. 각 시대마다 생활문화를 충분히 잘 익혀서 다음 시대로 넘겼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우리 차지다. 우리는 21세기에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 그렇다고 배턴을 아주 바꿔버려야 하나? 아니다. 본래 가지고 있던 배턴에 첨가할 것과, 거기서 버릴 것을 구분하여 그대로 쥐고 있음이 바람직하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하는 것은 자연 현상이지만, 그 줄기가 되는 배턴의 역할에는 변화가 없다.

각 민족이 어우렁더우렁 어울려 살고 있는 미국에서는 가끔 쥐고 있는 배턴의 건강을 체크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거주지가 어디든지 고유문화의 배턴을 꼭 쥐고 달린다면 더 생기가 넘치는 고유문화를 이어갈 수 있다.

한국 여자 선수들의 빙상 릴레이를 보면서 그들과 함께 어울려서 얼음 위를 달리며 쥐고 있는 배턴에 힘을 싣는다. 우리가 할 일은 다음 주자한테 배턴 터치를 할 때까지 배턴을 놓치거나, 떨어뜨리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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