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리가 할 일은 현재진행형

2013-11-0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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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장봉재 씨가 11월 1일 사망했다고 한다. 낯익은 얼굴, 낯익은 이름이다. 그는 뉴욕이민 역사상 중요한 사건인 1990년 브루클린 한흑분규의 중심인물이다.

그 해 1월 18일 브루클린 처치 애비뉴에 위치한 장봉재씨의 청과상점 레드 애플에서 발생한 아이티 출신 여성 고객과의 다툼이 소송으로 가고 지역 주민들의 불매운동으로 번진 이 사건은 본인의 꿋꿋함과 한인들의 격려로 텅 빈 가게를 지키며 피 말리는 시간이 1년 반 동안 계속 되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흑인들의 불법시위가 열리고 흑인과격 운동단체들이 참여하여 점차 규모가 커져가던 시기, 법원으로부터 폭행 무혐의와 시위중지 명령이 내려졌지만 시위는 가라앉지 않았다. 가게 매상은 나날이 떨어져 신문 1면에는 ‘레드애플 오늘 매상 34달러’, 다음날에는 ‘16달러’ 등으로 매일 레드 애플 현황이 소개되었다.

이민 와 청과상을 비롯 자영업을 주로 하는 한인들에게는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1990년 9월18일 “본인은 물론 가족, 걸어 다닐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다 시청 앞으로 갑시다”며 서로 전화 연락을 했고 뉴욕 시청 앞과 잔디밭 가득 구름처럼 몰려든 한인들이 평화 집회를 열었다.

이 날 앞집 지하실에 사는 새댁은 6개월 된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참여했고 옆집의 미국회사 다니는 샐러리맨은 하루 휴가를 내어 참가했다. 또 그 자리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수십 년 만에 만나는 등 한인 1만여 명은 ‘인종화합’이란 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서 한인보다는 흑인 입장에 선 정치인들에게 우리의 결집력을 보여주었고 당시 딘킨스 뉴욕 시장이 ‘시위 중단’ 법원 명령을 집행하는 결단을 내리는 성과를 거두었고 시위는 종식되었다.

사건의 당사자인 장봉재씨는 근 1년 반 동안 흑인 수백 명이 가게를 둘러싸고 위협적인 구호를 하니 가족들의 안위가 걱정되는 한편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맘 같아서는 당장 문을 닫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흑인들의 압력으로 가게 문을 닫으면 차후 한인들은 흑인 동네에서 장사를 할 엄두를 못낼 것이고 한인들의 아메리칸 드림도 접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사건이 종결된 후 장씨는 가게를 팔고 그 곳을 떠났고 그후 10여년 간 사업을 했지만 크게 이루지는 못했다. 1년 반 전 발생한 백혈병으로 골수이식도 받았지만 끝내 세상을 떠난 그는 장기간 불안과 공포감 등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 받았다고 한다.

사실 1970년대 후반부터 뉴욕 일원의 흑인 밀집지역에서 한인상인과 흑인 고객간의 크고 작은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레드 애플 가게 사건이 전 미주로 확산될 까 걱정한 한인들은 슬기롭게 이 위기를 헤쳐 나갔다.

더 이상 누가 잘못했다고 따지지 않고 평화대회를 열었고 지역 흑인사회에 장학금 주기, 블럭 파티에 도네이션 하기, 연말파티에 흑인지도자 초청하기 등등 무조건 끌어안는 방침으로 타인종, 타민족 교류를 본격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레드 애플 사건을 수수방관하던 정치인을 비롯 선출직 공무원에 출마하는 정치인들이 한인사회 행사에 참여하고 한인식당에서 갈비와 김치를 먹고 한인신문과 TV에 인터뷰와 광고를 한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한국어로 된 후보자 경력과 공약, 개헌 주민투표안에 대해 설명하는 책자를 배포하고 일부 한인밀집지역에서는 투표용지가 한글로도 명시되어 있다.

시민단체나 봉사단체들이 많이 생겼고 이들의 노력으로 인해 선출직 한인공무원이 생겨났고 한인사회 정치력이 신장되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플러싱이나 베이사이드 등 한인밀집지역을 살짝만 벗어나도 투표소에서 같은 한인을 만나기란 어렵다. 지난 5일 본선거에 참여한 2세들은 드물었다.

더 이상 한인사회에 장봉재씨처럼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으려면 좀더 많은 유권자, 높은 투표율이 필수다. ‘한인의 정치적 힘을 기르자’는 자각을 준 레드 애플 사건은 과거 속으로 흘러갔지만 우리가 할 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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