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맞이

2013-10-1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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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며칠 전 메트오페라의 ‘유진 오네긴(Eugene Onegin)’을 보았다. 푸쉬킨의 동명 소설을 토대로 한 이 오페라는 1820년경 러시아를 무대로 ‘한번 어긋난 사랑은 다시 이뤄지지 않는다’, ‘과거는 돌아갈 수 없다’, ‘삶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사랑에 대한 회한, 세월의 덧없음, 지나간 기회 등에 대한 화두를 관객에게 던져주었다.

물론 이 작품은 오랜기간 메트 무대에 올려지고 있는 모차르트의 로맨틱 오페라 ‘코시 판 투테(Cosi fan tutte, 여자란 모두 이런 것)‘에 비해 티켓 값이 월등하게 비싸고 티켓도 구하기 힘든 이유가 메트가 새로운 프로덕션으로 개막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주제가 가을에 어울리기 때문일 거라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겨울을 예고하는 이 가을에, 두 청년들이 각자의 연인 마음을 시험하다가 해피엔딩을 맞는 ‘코시 판 투테’를 보기는 웬지 밍밍하고 재미가 없는 것이다. 가을, 겨울에는 ‘유진 오네긴’처럼 헤어지고 고독하고 쓸쓸한 감수성이 어울린다.
낙엽 지는 가을이 온 지 얼마 후 작가 최인호가 향년 68세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2008년부터 투병 중인 것은 알지만 막상 뉴스를 보자 갑자기 내 젊음의 한 귀퉁이가 툭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최인호는 별들의 고향, 겨울 나그네 등의 소설을 쓴 작가로 1960~1970년대에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로 상징되는 청년문화의 중심인물이었다. 미국에 오래 살다보니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의 부고를 접하면, 한국에 가서 만날 것도 아니면서 이제 다시는 못 보겠구나, 이 사람의 시대가 갔구나, 나의 지난 시대도 갔구나, 하게 된다.
한국에서 20, 30대를 보낸 뒤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젊은 날의 방황과 허무를 최인호의 소설, 영화, 드라마를 통해 위로받았다면 중년, 노년에 접어든 지금은 무엇으로 치유 받고 있을 까! 여행이나 독서? 아니면 골프를 비롯한 취미생활? 그냥 편하고 부담 없이 한국의 드라마와 연예오락 프로에 빠져있을까?
일반적으로 가을이 오면 사람들의 마음은 바빠진다.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하여 월동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미혼여성의 월동 준비는 남자친구가 첫째이겠지만 노년을 바라보는 여성들은 옛사랑의 그림자는 그저 그림자 일뿐, 자신의 삶 자체를 놓고 상념에 잠길 때가 많다.
젊어서는 누구나 레드 카펫을 밟는 삶을 꿈꾸었지 진흙탕 길을 걸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살다보니 뽀송뽀송 마른 길보다는 발이 푹푹 빠지는 사막도 걷고 진흙구덩이에 들어갔다가 온통 양발에 진흙을 묻힌 채 겨우 겨우 힘겹게 빠져나오기도 했을 것이다. 살아보면서 마음 한 귀퉁이에 구멍이 뚫리고 상처가 난 사람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이럴 때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 예술이 지닌 감수성이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하며 정화시켜준다. 문화 활동에 나타난 희로애락의 감정들이 자신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깨달음을 주기도 하고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문화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올 가을맞이는 한국에서 공무원 생활 39년을 은퇴하고 생전처음 미국을 방문한 오라버니 덕분에 한동안 잊었던 문화적 경험을 넘치도록 했다. 메트박물관, 자연사박물관, 모마,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필하모니 공연, 메트 오페라까지 마치 횡재한 것처럼 문화의 향취에 흠뻑 취했다. 일년을 주기로 봄여름가을겨울은 반복되고 자연은 싹이 나고, 무성해지고, 단풍이 들고, 낙엽으로 사라진다.

이번에 ‘유진 오네긴’을 보면서 무릇 살아있는 모든 것은 슬프지 않은 것이 없다고 새삼 느꼈다. 앞날을 예측 못하고 유한한 삶을 살다가 결국은 사라지고 마는 인간의 삶 자체가 슬픈 것이다. 그래서 예술작품에는 기쁨보다는 고통과 슬픔, 상처가 더 많이 묘사되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느끼고 소통하며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도 한다.이 계절, 문화현장을 찾아 갈 곳이 많아서, 싱싱한 두 다리로 돌아다닐 수 있어서, 살아있어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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