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세진이의 위대한 승리

2013-09-2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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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훈(사회1팀 기자)

지난 21일 오전 미국 최대 10km 야외 수영마라톤 경기(원영) ‘리틀 레드 라잇 하우스’ 대회가 열린 맨하탄의 북서쪽 끝에 위치한 ‘라 마리나’ 선착장.
주변에 모인 수십 명의 관중들이 검푸른 허드슨 강물의 파도를 힘차게 가르며 다가오는 한 무리의 수영선수들을 향해 힘찬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선수들이 하나둘씩 선착장으로 도착하며 환호소리가 더욱 높아지던 순간, 관중들은 잠시 숨을 죽이고 눈앞의 광경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물 밖으로 나와 마지막 결승선으로 뛰어가는 선수들 너머로 힘겹게 강변을 양팔로 기어오르는 한 동양인 소년이 눈에 뛰었기 때문이다. 그 동양인 소년은 바로 두 발과 오른손 손가락 3개가 없는 무형성 장애를 안고 태어난 ‘로봇다리 희망전도사’ 김세진(17) 군이었다.


휠체어에 오른 뒤 결승선으로 향하는 김 군의 손을 맞잡기 위해 관중들이 통제선 너머로 팔들을 길게 뻗은 모습은 이날 대회의 진정한 우승자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광경이었다. 김 군은 이날 유일한 장애인이자 최연소 선수로 참가해 당초 예상과 달리 1시간50분이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18세 부문 1위는 물론, 전체 280명 선수가운데 21위의 성적으로 대회를 마쳤다.
“완주에 큰 기대를 품진 않았다”는 어머니 양정숙씨는 “세상의 파도를 헤쳐 가는 방법을 세진이에게 알려주고 싶었는데, 오늘 이미 훌쩍 커버린 세진이를 만나게 됐다”며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양정숙 씨는 아들에게 다정다감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장애를 안고 태어난 김 군에게 ‘장애는 벼슬이 아니니, 사람들에게 배려 받을 생각은 버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호되게 키웠단다. 덕분에 김 군은 어린 시절 학교 친구들의 철없는 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의 편견과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무릎 꿇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방법을 배우게 됐다.

대회 직후 김 군은 “이번 대회 성적을 바탕으로 국제수영연맹이 주최하는 마스터즈 수영대회에 장애인이 아닌 일반인 자격으로 출전하려 한다”며 “장차 2016년 브라질 하계올림픽 원영 종목에 정식 선수로 출전해 메달을 목에 걸고 태극기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 군의 하체엔 사지가 멀쩡한 일반인들도 감히 해내지 못하는 일들을 이뤄낸 위대한 로봇 의족이 다시 채워져 있었다. 김 군의 말이 기자의 귓가에 아직도 맴돌고 있다.“어떤 생김새로 세상을 살아가는가 보다 어떤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합니다.”김세진 군과 어머니 양정숙씨의 못다한 이야기는 오는 29일 7시 뉴욕장로교회에서 열리는 ‘뉴욕밀알의 밤’에서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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