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침묵의 지혜

2013-09-1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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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주필)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일찍이 이집트를 방문해 사제들로부터 모든 학문을 배우고 돌아와 자신의 사상을 제자들에게 설파했다. 그의 사상에 심취된 제자들은 처음 배운 것이 오랜 침묵 끝에 말하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그의 사상을 배우는 동안 수 년 간 침묵해야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진리를 깨우쳐 생활에서 그대로 실천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피타고라스의 사상을 완전히 배울 때 까지 그 가르침에 대해 아무런 논증이나 질문도 하지 못하고 줄곧 침묵으로만 일관해야 했다. 장기간의 인내를 통해 옳은 말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지금 모습은 어떠한가. 무슨 사건이 터지면 너도 나도 목청을 돋우며 어떻게든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려고 드는 것이 일쑤이다. 이런 우리들의 모습에 일침을 가하는 한 예화가 있다.


어느 선비가 강을 건너게 해주는 사공에게 으스대며 물었다. “자네 글을 지을 줄 아는가?” “모릅니다.” “그럼 세상사는 맛을 모르는구먼. 그러면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아는가?” “모릅니다.” “저런 인간의 도리를 모르는구먼. 그럼 글을 읽을 줄 아는가?” “아닙니다. 까막눈입니다.” “원 세상에! 그럼 자넨 왜 사는가?” 이때 배가 암초에 부딪쳐 가라앉게 되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사공이 선비에게 물었다. “선비님, 헤엄칠 줄 아십니까?” “아니 난 헤엄칠 줄 모르네.” “그럼 선비님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선비가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정작 위험한 순간에는 살아남는 법을 모른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이야기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빈 수레가 요란한, 즉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꽤 많은 것이 현실이다.

요즘 한국정가도 보면 너무나 시끄럽고 요란하다. 국정원 대선개입, 국회의원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등에 이어 최근에는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아들 의혹 사건과 관련해 채 총장 사퇴에 ‘청와대개입설’ ‘법무부 감찰착수’ 등 정치권이 연일 치열한 공방을 벌이면서 정국이 장기간의 대치국면을 치달아 보기만 해도 너무 숨 가쁘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사건만 생기면 잇달아 당의 이익에 맞게 편파적인 주장들을 내놓기에 바빠 진실이 호도되면서 사건에 대한 규명자체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매번 이런 모습을 접할 때 마다 한국정치권도 이제 좀 이성을 되찾고 성숙해져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올바른 정치를 하려면 우선 바른 말을 하기 위한 장기간의 침묵과 인내가 너무나 필요해 보인다.

항아리의 동전 하나는 시끄러운데 가득한 항아리는 시끄럽지 않다고 했다. 지식을 제대로 갖춘 사람은 함부로 말을 하거나 시끄럽지 않은 법이다. 말은 무언의 언어라고 하였다. 잘 모르면 차라리 말을 않는 것이 백 마디의 말보다도 더 설득력이 있고 힘이 있다는 뜻이다.

역사의 위인들은 쉴 새 없이 지식을 답습하고 깨우치며 살았다. 오늘의 시대는 지식이 많지 않으면 살기가 어려운 세상이다. 하지만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제대로 산다고는 할 수 없다. 지식에서 진짜 필요한 것은 삶의 지혜이다. 그것은 위인들이 남기고 간 진리의 샘에서 얼마든지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들의 사상 속에 깊이 든 신비를 묵상하고 자신을 쉬지 않고 갈고 닦는 노력이다. 그런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침묵할 수 있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지식과 지혜를 쌓아야 하는 이유는 침묵의 지혜를 내 것으로 만들어 겸허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한국고서에 “물은 웅덩이를 채우고 나서야 흐르고 흐르는 물은 스무발이 흘러야 맑아진다.”는 말이 있다. 열 발도 흐르지 못하고 흙탕물만 계속 튀기는 한국정치인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까. 말은 침묵에 침묵을 더한 후 꼭 쓸 말만 하라는 뜻으로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다. “침묵 중에 최선의 침묵은 말하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인 모두가 깊이 되새겨 보았으면 하는 명구(名句)이다.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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