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명

2013-09-1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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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


지난 주 뉴욕 브루클린에서 고양이 피란 작전이 전개되었다. 어미 고양이 두 마리가 새끼 열한 마리와 함께 지하철 철로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순간 기차에 치어 죽을지 알 수 없다. 철도국 직원들은 B 노선을 두 시간, Q노선을 50분간 멈추게 하고 고양이들을 체포하여 성공적으로 이사시켰다. 고양이지만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몇 해 전 북극해에서 어름이 갇힌 고래 두 마리를 엄청난 비용을 들여 구출한 사건이 있었다. 생명을 아끼기 때문이다.

2001년 9월 11일 맨해튼 세계무역센터 폭파 테러로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다. 금년 그 12주년을 맞아,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와 대사관 직원 세 명이 살해되었다. 이것은 오바마 대통령을 몹시 수치스럽게 하였다. 오바마는 리비아가 자국민 반대파 1,500명을 화학무기로 학살한 사실을 빌미로 공습을 감행하려고 하였으나 반대여론에 밀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보복의 이유가 당연한 것 같아도 생명의 살생은 또 다른 생명의 살생으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교황은 하루의 금식기도를 호소하여 생명의 귀중함을 일깨우게 하였다.


예수는 이렇다 할 성취를 보여주지 않았다. 역사에 남을만한 저서도 활동도 없다. 그러나 예수는 생명에 대한 사랑을 남겼다. 십자가는 바로 생명을 사랑한 예수의 흔적이었다. 이 귀중한 생명은 몇 가지의 성취와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다. 시간의 연장이 생명이라지만 신이 내린 생명은 시간과도 바꿀 수 없다. 하나의 생명을 위하여 평생이 걸릴지라도 어쩔 수 없다. 인간의 노력의 대부분이 안락(安樂)을 위한 투자이다. 그러나 생명은 안락과도 바꿀 수 없다. 잘 살았다는 것은 편하게 살다가 죽었다는 뜻이 아니다. 생명의 가치는 좀 더 높은 데에 있다.

성취에 대한 만족이 살고 싶어지게 하는 에너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생명은 인간의 충족과도 바꿀 수 없다.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며, 무엇을 성취하려고 생명이 이용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신의 선물이며 싫으나 좋으나 우리는 그것을 받아야 하고 잘 가꾸어야 한다. 오래 산다는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생명을 훌륭하게 가꾸는 것이다. 인간의 바른 삶이란 받은 생명을 빛나게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 때문에 얼마나 사느냐 하는 것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우리가 만일 자기를 중심으로 생명을 본다면 무척 허무해진다. 약간의 사랑과 약간의 미움과 약간의 땀을 흘리고 하루가 저문다. 그리고 약간의 꿈과 약간의 소득과 약간의 희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면 그것은 허무하고 초라한 생명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명을 생각하면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하나님이 목적이 있어서 내 생명을 주셨고 오늘이란 시간도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신 생명을 누린다고 믿을 때 나도 귀중한 존재가 되고 남의 생명도 존귀하게 된다.

인류학자 마니(Marney) 박사가 중국을 방문하고 황하(黃河)를 바라보며 이런 감상을 썼다. “2,000년 동안에 황하의 범람은 1,500회가 있었다고 한다. 양자강은 연례적인 범람으로 수천의 인명을 앗아갔다. 옛날 모스코바의 역병은 25만의 생명을 죽였다. 일본의 관동대진재는 단번에 10만의 생명을 사라지게 하였다. 지구의 자연재해는 해마다 약 20만 명의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이렇게 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모르는 척 한다면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같다.”

인도에서 도둑 군수가 발각되었다. 콜하프 군의 마히라자 씨는 존경받는 군수이고 밤에는 강도단의 수령이다. 철저하게 두 얼굴의 신사였던 것이다. 웃을 것이 아니라 나도 두 얼굴의 때 묻은 생명이 아닌지 반성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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