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들국화

2013-09-0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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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목사>

레코드 지는 지난 주 수요일 뉴저지 주 버겐필드에서 실종된 81세의 노인 위클런드 씨에 대한 기사를 보도하였다. 노인의 실종을 알게 된 이 가정에서는 나흘을 찾아 헤매었는데도 찾지 못하고 있다가 주일 오후 실종된 집에서 겨우 일곱 채 떨어진 어느 집 뒤뜰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뒤뜰에 국화가 만발하였는데 한 노인이 그 곁에 하염없이 앉아있더라는 것이다. 영양실조와 수분 부족으로 거의 죽게 된 직전에 발견된 것이다. 치매 노인이다. 미국의 치매 환자는 250만 명이나 되어 큰 사회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옛 시조 한 편을 소개한다. <늦장마 잔칼질에 뼈만 남은 비탈길을, 한 송이 들국화 제 철이라 꾸몄구나, 나그네 지친 장대를 여기 꽂고 쉴까나> 억수 같은 장마가 모든 것을 휩쓸어 앙상하게 뼈만 남은 것 같은 비탈길인데 신통하게 작은 들국화 한 송이가 자랑스럽게 우뚝 서 있다는 표현이다. 그 이름다움, 그 숭고함이 거의 쓰러지도록 지친 이 피곤한 나그네에게 활력을 주었다. 아름다움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 들국화의 아름다움에는 자랑스러움이 깔려있다. 비바람과 싸운 경험이 있으며 홍수를 견디어 낸 투지가 있고, 혼자서라도 국화의 철을 대변하는 용기가 뒷받침 되어있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한겨울에도 냉수마찰을 하는 습관을 가지셨다. 놀라서 구경하고 있으면 “찬 맛이 참 좋다”라고 말씀하시곤 하였다. 인생은 찬 맛을 음미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는 맛을 알게 된다. 세탁소에서 땀 흘리고 채소 가게에서 지치도록 노동해도 땀의 대가가 아니라 땀 자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하는 소월(素月)의 시는 괴로움이 있었기에 달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인생의 귀중한 경험을 말해 주고 있다. 고생을 낙(樂)으로 삼아야 한다. 땀을 자랑으로 여기자.

시조 한 편을 더 감상한다. <오동에 듣는 빗발 무심히 듣건마는, 시름이 하니 잎잎이 수성(愁聲)이로다, 이후야 잎 넓은 나무를 심글 줄이 있으랴.> 오동잎에 빗발 퉁기는 소리가 걱정 많은 시인의 수심을 자극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나뭇잎이 오동잎처럼 넓은 것은 아니니까 다음번에는 작은 잎새의 나무를 심어 빗줄기의 애가(哀歌)를 바꾸어 보겠다는 건설적인 슬기를 노래하고 있다.

폭풍이 올 때 닭은 자신의 날개 속에 얼굴을 파묻지만 독수리는 날개를 펴고 그 바람을 타고 안전한 곳으로 날아간다. 네델란드 격언에 “바이킹은 북풍에 시달릴 때 큰 배를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다. 바이킹(viking)은 옛날 북유럽에 살던 민족으로 일찍이 조선술을 개발하여 대서양 일대를 휩쓸었다. 그들은 자기네 땅이 몹시 춥고 좁아 고통스런 자연환경이었으나 자연 조건에 굴하지 않고 큰 배를 개발하였던 것이다.

악조건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임하는 정신적 태도가 문제이다. 흔히 사람들은 고통의 해결책을 외부에서 찾지만 사실은 고통과의 용감한 투쟁 속에 해결에 이르는 길이 있다. “아플 때는 잘 앓아야 한다”는 말처럼 고통을 지긋이 씹어보는 인내의 맛을 터득할 때 고통이 극복된다. 요즘 사람들은 조급해서 기다림의 맛을 모르는데 괴로울 때 기다림의 예술을 터득해야 한다.

위대한 업적들은 불같은 고통 속에서 탄생되었다. 버니언(John Bunyan)의 명작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은 감옥에서 집필되었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은 그녀 자신 중환자였으나 영국의 병원을 개혁하였다. 프랑스의 파스퇴르(louis Pasteur)는 반신불수였으나 병균 연구와 많은 면역체를 개발하였다. 미국의 역사가 파크맨(Francis Parkman)은 시력을 거의 상실하였으나 20권의 대작 ‘미국사’를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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