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느릿느릿 느리게

2013-08-2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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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범 수 <치과의사>

지난 주말 빅베어에서 열린 침묵기도 수련회에 다녀왔다. 한 여름 풍성한 태양 아래 빅베어 레익은 잔잔한 물비늘을 수도 없이 만들어냈다. 호수 저 멀리 끝자락을 바라보면 햇살이 거기 멈춘 듯 눈이 부셨고 눈길을 가까이 당기면 부서진 햇살이 유리조각처럼 빛났다.

첫날 하이킹은 소나무 숲 사이로 이어지는 약 2 마일의 오솔길. 삼림욕을 할 때 나무에서 나온다는 살균력 강한 파이톤사이드(피톤치드) 덕분인가. 스트레스가 사라진 머릿속 뿐 아니라 심장까지 시원해진 기분이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시간, 모두들 숙소로 돌아왔다. 돌과 통나무의 아름다운 조합으로 튼튼하게 지어진 숙소 한 옆으로 소나무가 긴 그림자를 만드는 둥그런 잔디밭에 모여 우리는 주로 휴식과 침묵시간을 가졌다. <그분을 잠잠히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달콤하니 내가 여호와 안에서 기뻐합니다… 우리말 성경 시편 104:34>내가 말하고 내가 구하고 내가 이끌어가는 기도를 멈추고 오랜만에 침묵하며 ‘잠잠히’ 있기!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있기! 그러고 보면 우리의 몸은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움직여 왔었다. 손가락을 구부려 물건을 잡거나 집거나 누르고 꼬거나 문지르거나 쓰다듬거나… 두 발은 또 어떤가? 걷거나 차거나 뛰거나 비비거나… 그뿐인가. 두 눈은? 바라보거나 쳐다보거나 노려보거나 째려보거나 흘겨보거나… 아! 정말 바쁘게 살았다.


편안하게 깎아 만든 통나무 의자에 앉아 두 눈을 감고 ‘잠잠히’ 있다가 가끔씩 눈을 떠보면, 은사시나무의 작은 잎사귀들이 바람도 없는데 일제히 흔들리고 있다. 은백색 가지들은 석양 아래 붉은 빛으로 반사하고 매달린 연록의 잎사귀들은 투명해진다. 내가 나무를 아주 오래 못 본 것 같기도 하고 바람의 간지러운 장난을 처음 만난 것 같기도 하다.

‘무엇 때문에 이리 바쁘게 살았을까? 천천히 가자!’ 하고 돌이켜 보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이미 내 귀에 그렇게 말했었다.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는 ‘느리게 사는 즐거움’을 통해, 우리가 하는 일상의 걱정 가운데 96%가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들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 40%, 이미 일어난 일 30%, 사소한 일 22%, 바꿀 수 없는 일 4%.

평생 목발을 짚고 살았던 영문학자 고 장영희 교수 역시 “내가 남보다 느리게 걷기에 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있었다”고 고백했었다. 그분의 시 한 편을 읽어보자. ‘너도 느리게 살아봐… 수술과 암술이 어느 봄날 벌 나비를 만나 눈빛 주고받고 하늘여행 다니는 바람과 어울려 향기롭게 사랑하면 튼실한 씨앗 품을 수 있지. 그 사랑 깨달으려면 아주 천천히 가면서 느리게 살아야 한다. (중략) 번쩍하고 지나가는 관계 속에서는 다사로운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사랑 한 올 나누지 못한다. 쏜살같이 살면 마음의 눈으로 봐야 할 것 볼 수 없단다. 아이야, 너도 느리게 살아 봐.’빅베어의 밤. 아까 앉았던 그 의자에 여전히 기대앉아 하늘을 본다. 토실하게 살이 오르기 시작하는 상현달과 아까부터 나를 내려다보는 별 하나. ‘잠잠히’ 바라다보면 그 별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아주 조금씩 몰래 움직인다. 별아, 네가 움직인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지? 나의 침묵기도 속에 ‘그분’이 조용히 들어오신다.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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