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 교회음악의 세속적 편향

2013-08-1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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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영(목사)

시인과 작곡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시인이 슬픈 시(詩)를 작사하여 작곡자에게 넘겨주면 작곡자는 그 가사에 걸 맞는 슬픈 곡을 붙여 듣는 감상자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끔 해야만 비로소 성공한 곡이 된다. 또 잠 못 이루는 아기에게는 수면제 같은 효능을 가진 곡이어야만 성공한 자장가가 될 수 있다. 투명한 빛 속에 일곱 가지 무지개 빛깔이 숨어있듯이 음에도 다양한 음색이 숨어있다. 복된 음, 기쁜 음, 성스러운 음, 잡음 등... 고급 음과 천한 음이 있다. 뜨겁게 세상을 달구다가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실증을 느끼게 하는 대중음악도 고급 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곡한 지 몇 백 년이 흘러갔지만 싫증나지 않는 순수음악은 물론 고급 음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순수문학이라는 것도 모르면 모르되 이것도 분명 고급사고와 고급문자들을 융합시킨 고명한 차원의 문학예술일 것이다. 그래서 순수문학과 순수음악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늘 잡문(雜文)만 쓰게 되고 잡곡(雜曲)만 쓸 수밖에 없게 된다.
상업주의 음악의 특징은 그 속에 이익과 상술밖에 없고 고객을 현혹한다. 예술성이나 순수성도 기대할 수 없다. 유흥음악은 관능적이며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이 목적이다. 반면 종교음악 작곡은 예술성과 성서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영적인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형이상학적 음으로, 신앙이 독한 작곡자와 가난한 시인이 서로 만날 때만이 가능해 지는 음악이다.


요즘 한국의 어떤 대형교회들은 그 아름다운 고급 음을 사용하여 우리 신앙의 선배들에게 신앙성장의 촉매역할을 했던 종래의 찬송가는 시대에 뒤떨어진 음악으로 생각하고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는 추세이다. 그들의 구차한 변명은 이렇다. 현대인에게는 현대에 맞는 음과 리듬이 적합하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 속을 좀 더 들여다보면 현대인에 맞는 그 리듬이라는 것을, 물질적 성장과 교인 동원을 위한 축제분위기를 고조시키려는 상업주의의 저의를 의심할 틈을 주고 있다.
초대교회 이후 어느 시대든 세속음악은 존재했지만 교회는 그 세속음악을 강하게 경계하였다. 음악의 고향은 원시 기독교음악이었다. 예수와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도들은 시편을 챤트로 부르며 로마의 박해를 견뎠고 이것이 바로크음악으로 발전되었고 종교음악의 대가인 바흐,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주옥같은 교회음악이 쏟아져 나온다.

음(音)의 속성은 언어보다 강하여 사람을 쉽게 변하게 하고 세뇌시키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이런 세속음악이 성도들의 신앙의 질을 몰래 변질시킬 수도 있으며, 세속인지, 교회인지, 유행가인지, 찬송가인지 또는 여자가 남자의 옷, 남자가 여자의 옷을 입는 (신22:5) 동성결혼 같은 혼돈되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바울은 고후6;15에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리요”라고 한 말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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