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제68주년 광복절

2013-08-1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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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기 훈 <센트럴 커네티컷주립대 교수>

벌써 68년이 되었다. 백의민족이 환희와 감격으로 맞이했던 8.15 광복은 거의 고희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당시 필자는 해방이 된 1945년 4월에 입학한 중학교 1학년생.

공부는 뒷전에 가고 일제의 식민지통치 하에서 강제로 동원돼 매일 중노동에 시달렸다. 회고하면 1392년 이성계 태조가 건국한 이씨조선이 1910년 역시 이씨(李完用)에 의하여 나라가 일본에 넘겨져 온 겨FP가 36년간 온갖 쓰라린 고초를 체험했던 암흑시대였다.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우리 고유의 이름을 모두 일본식으로 바꾸어야 했었다. 일본말 전용을 강제 시행했고 어쩌다가 우리말을 했을 경우 일본선생은 우리를 가차 없이 벌했다.


일본 고유의 800만 신을 섬기는 신또(神道)의 상징인 신사참배도 강요당했었다. 유일신을 섬기는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이를 거부하여 경찰에 연루되고 핍박을 받았다. 끝내 지조를 지킨 분들이 순교하기까지 신앙을 사수한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전쟁으로 모든 물자가 부족했고 식량은 배급을 통하여 겨우 연명하였다. 한국의 쌀은 무조건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정부에 바쳐야 했었다. 우리는 만주에서 생산된 콩과 옥수수, 그것 도 진수는 ‘기름’으로 빼고 남은 찌꺼기를 배급받아 요기를 했었다. 동시에 우리 한민족은 학도병을 비롯하여 군인, 군속에 징집이 되어 일선에 배치가 되었었다. 특히 자유를 완전히 잃은 부녀자들은 소위 종군위안부라는 명목 하에 성노예로 강제동원이 되었었다.
근 70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은 이 사실을 은폐 또는 부정으로 해결을 지우지 못하여 미국을 비롯한 많은 우방국들의 비난을 사고 있다. 미국 큰 도시에 고초를 당한 이들의 기림비를 건립하는 쓰라린 과거를 목격하고 있지 않는가!
일본의 히로시마에는 8월 6일, 나가사키에는 9일에 원자탄이 투하된 직후 드디어 8월15일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날도 필자는 다른 동료학생들과 함께 대구 교외에 있는 동촌의 공군비행장에 동원이 되어 일하고 있었다. 활주로 끝에는 나무로 만든 가짜 비행기 두 대를 세워놓고 그물로 덮어 위장했었다. 진짜 전투기는 흩어진 과수원에 끌고 가서 사과나무 몇 그루씩을 자르고 그 속에 ‘숨기는’ 작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휴식시간 때 땅에 누워 있으면 바로 눈 위에 골프공 크기의 푸른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어 수없이 따먹었다. 일을 마치고 하숙집에 돌아오면 입안은 미숙한 사과를 먹은 탓으로 저녁 맛이 아주 정상적이 아니었다.
8.15 그날 일본 사병들은 부인하였지만 장교 한 사람이 지나가면서 ‘오늘’ 천황의 방송이 있다는 정보를 전해주었다. 콧소리로 녹음이 된 항복의 방송. 일본에서는 천황이 있는 궁성(宮城) 앞 광장에서 더러는 서서, 혹자는 땅에 꿇어앉아서, 아니면 덥석 앉아서 방송을 들었고 대부분 울기도 하였다. 분노를 감추지 못한 군인들도 있었다.

해방! 정말 감격스러운 8.15였다. 이젠 보국대에 가지 않아도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수학을 담당하신 선생님이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감계무량 했었다. 우리는 신이 나서 그저 큰 소리로 “가갸, 거겨, 고교…” 라고 외쳤는데 선생님은 “너무 그렇게 큰 소리를 내지 말라. 바로 옆 교실에는 아직 일본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다.”라고 신경을 쓰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릴 때 뇌리에 입력이 된 일본말 중 곱셈이나 물건을 세는 것은 68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말로 하고 있는 실정이다.

8.15의 기쁨과 감격을 다시 살리는 8월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독일은 이웃나라들에게 즉각 모든 죄과를 사과하고 보상도 하였다. 역사책은 인근국과 상의하여 출판했으며, 구 주연합(EU)을 성취하여 평화스러운 국제관계를 이루었다. 이미 늦었지만 그레도 일본은 68년 이 지난 지금 독일이 실행한 교훈을 배우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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