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랑의 시발점

2013-08-0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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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홍(목사)

바보온달과 낙랑공주를 보면 남녀의 사랑이 사랑의 출발점인 듯 보인다. 인간의 역사에서 사랑이란 남녀의 관계에서 출발을 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 사랑의 출발점을 부인 할 수가 없다. 거기에서 인생이 대를 이어 태어났고 문명의 발전을 통해 오늘이란 찬란한 역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생이 있기 전에 사랑이란 없었다는 것인가? 아니다. 사람 이전에 자연 속에서 번식이란 역사를 통해 암컷과 수컷이 만나 사랑의 아름다움을 보였기에 번식이라는 질서를 세워가며 오늘에 모든 자연이 제 자리를 잡고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무형의 사랑이 사람이전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사랑의 기원은 언제인가? 생각할수록 흥미를 끈다.


나는 목사이기에 사랑의 기원을 우주 만물이 있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다. 신이 존재하면 그 신은 사랑의 본체이리라. 인간들이 추상적으로 만든 신들도 사랑의 신과 저주의 신을 보이고 있다. 본래 신이란 사랑을 전제하고 있을 존재이리라. 신은 모든 것이 있기 이전이기에 어떤 선입견이나 상호유익에서 사랑의 개념을 해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은 자신의 무한한 존재를 보이기 위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을 사랑이라 말했을 것이다.

신의 사랑은 가장 아름답고 귀하고 변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인간들이 구가하는 사랑은 시간이 가면 변하고 거리가 떨어지면 잊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신의 사랑은 시공을 초월하여 나누어지는 변함없는 사랑의 실체일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우리는 구분하여 나누어 본다.

신(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아가페 사랑이라 정의 한다. 이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 그 특색이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있어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는 신만이 소유하고 누리는 영역에서 보여진 사랑일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랑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영역에서는 이런 사랑의 극치를 보일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랑을 노래는 할 수가 있어도 실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이런 사랑의 모습을 보기 원하여 자신이 독생자를 주어 사랑의 절정을 보이며 살라고 부탁하고 있다.
남녀가 나누는 에로스의 사랑도 볼 수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기에 진실성이 약하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나눔에서 자녀에게 이어지는 사랑(스트로케)은 생명까지 넘어선 사랑의 최고를 보일 수가 있다. 그래서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했다.

우리가 깊이 나누고 싶은 사랑의 줄이 있는데 친구의 사랑이다. 필리오 친구의 사랑은 참으로 귀하고 높여 노래하고 싶다. 옛 말에 부모 팔아 친구를 산다고 했던가! 그래서 예수님도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격찬을 하셨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요 사람 사이에서나 신과의 관계에서 보여지고 나누어질 귀한 것이다.

만일 이 세상에 사랑이란 단어가 없었다면 인생의 삶은 무미건조한, 아니 생존의 의미도 후손의 대 이음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사랑은 인간의 삶을 재미있고 의미있게 만들어 주었다.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 주는 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부터 사랑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랑의 참 의미를 만들어가고, 남녀의 사랑을 승화시켜 인간다운 세계를 만들어가므로 밝은 세상을 만들어 가자. 거기에 친구의 사랑을 통해서 인간미가 통하는 훈훈함을 보이자. 또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눔에서 성도간의 끈끈한 정을 나눔으로 사회를 하나로 묶어가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자. 사랑은 보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이다. 인생의 존재는 사랑을 먹어야 산다. 이는 행복의 알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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