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모래시계와 김종학PD

2013-07-2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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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 객원논설위원

사람 중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유명 배우, 유명 작가, 유명 음악가, 유명 교수 등등. 한 번, 만나지 않았음에도 어떤 사람을 좋아할 경우 그 사람의 팬(Fan)이라 부른다. 팬인 경우 작가는 못 만나도 작가의 작품을 통해 간접 만남은 가질 수 있다. ‘모래시계’를 제작 연출한 김종학피디(PD)도 팬을 많이 가진 사람 중의 하나다.

몇 년 전 비디오 대여점에서 24부작인 모래시계를 다시 빌려 본 적이 있다. 처음 봤을 때 감동받은 여운이라 할까. 1995년 방영돼 평균 시청률 50.8%를 기록해 ‘귀가시계’로 불렸던 모래시계. 그 때엔 누가 제작자이고 연출자인지도 모르고 봤었다. 그 후 연출자를 알고 난 다음 김종학PD의 작품은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재미있게 보곤 했다.


김종학. 그가 62세의 나이로 번개탄(연탄)을 피워놓은 상태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 23일 경기 성남시의 한 고시텔에서 발견된 그의 시신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가족에게 미안하다’라는 유서를 남겼다. 세상에,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왜 미안한 일을 저질렀을까. 왜 그는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택했을까.

돈과 명예를 한 몸에 지녔던 그.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제작한 작품들이 연이어 실패하자 그는 연기자들에겐 출연료를, 직원들에겐 임금을 주지 못했다. 실패한 드라마는 ‘아들 녀석들’ ‘신의’등 총 9편이나 되며 미지급 금액은 약 30억 원에 달한다. 급여와 출연료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그를 고소했고 그는 검찰의 수사를 받아왔었다.

한국 최고의 드라마 연출자에서 돈 떼어먹는 사기꾼으로 전락해 버린 김종학. 자신의 명예에 타격을 받은 그의 자존심과 돈(빚)이 그를 불귀의 객으로 만들지 않았나 본다. 사람들은 말한다. “아, 그래도 살아야지! 죽으면 어떻거나. 시궁창에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살아남아 다시 과거의 명예를 회복해야지. 그까짓 자존심과 돈이 대수인가!”.

2009년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해시 봉하산 바위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그 당시 그도 검찰의 수사를 받던 중이었다. 박연차 정관계 로비사건에 연루돼 대통령 가족들이 포괄죄 뇌물수수 혐의로 수사를 받던 중 노무현 전 대통령도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조사를 받고 나온 지 한 달이 안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바로 ‘운명이다’에 있다. 그렇다면 김종학PD의 죽음도 운명인가. 아니다. 자살은 운명이 아니라 운명을 거슬러 내려가는 거다. 운명이란 자연스레 태어나 삶을 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있다. 고통과 불행에 굴복하여 목숨을 끊어 버린다면 이 세상에서 살아남아 있을 자 그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고통이 자신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가족에게까지 파급된다면 그 부담은 가중돼 스스로 운명을 거슬러 내려가는 자살을 선택할 수 있다. “자신 하나가 사라짐으로 인해 가족과 주위 사람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이런 선택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종학피디가 가졌던 운명 거스름의 결정적 요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몇 년 전 죽음 같은 고통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겪은 적이 있다. 그 때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온 말이 “하늘이시여 이대로라면 고통 없이 데려가 주세요!”였다. 빚이든 병이든, 이유야 어떻든 정신·육체적으로 고통과 좌절이 자신과 가족에게까지 파급될 때, 사람은 돌파구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극한상황까지도 간다는 것을 경험해 본 거다.

김종학PD의 죽음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그들은 운명대로 살다 죽은 것이 아니라 운명을 거슬러 내려가며 죽은 사람들이다. 떠난 사람들이야 말이 없다. 그래도 할 말이 많이 남은 살아있는 사람들. 보통사람으로 마음의 빚, 물질의 빚 안지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모래시계처럼 살다 가버린 김종학PD. 하늘에선 빚쟁이도, 고통도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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