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깨달음

2013-07-2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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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재 욱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그 아비는 일생 ‘밤을 잊은그대’였다.

그도 이제 나이 오십 줄에들어서자, 눈도 침침해지고 팔다리의 근력도 예전 같지 않아 몸의 순발력이 눈에 띄게무디어졌으며, 총기마저 흐릿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남의 일처럼 생각했던 인생의 덧없음을 막상 실감하게된 그는 별수 없이 쓸쓸해졌다. 이즈음 그는 은퇴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고, 이렇게 낡아가는 몸으로야 그 동안쌓은 영광된 이력에 자칫, 치욕적인 오점을 남기기 십상이라는 생각에서, 아쉽지만 용퇴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올해로 열여섯 살 난 아들놈이 가업을 잇겠다고 기특한 결심을 하고 나선 것이 다소 위안이 되었다. 녀석은 말귀가 트이면서부터, 아비의 밥상머리무용담을 수없이 들어온 터였다. 몸이 굵어지고부터는 갸륵한 효심으로, 아비의 곁꾼으로 붙어 실전에 임했던 경험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노련한 아비의 눈에 걸리는 것은 마지막 한 수,천하에 의지할 데라고는 자신밖에 없는 고립무원, 그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을 극복한 경험이 아들에게는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러 궁리 끝에 아비는 마지막 은퇴기념 작업을아들과 함께 치르기로 하고, 바로 작전수립에 들어갔다. 아비의 궁리대로라면 엄청난 위험부담을 안고 수행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인 조치 이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드디어 작전 개시일이 되자. 둘은 칠흑 같은 야음을 틈타 목적지에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먼저 그 댁의 곳간부터훑고 영양가가 없으면 안방에 문안드리기로 작전을 세워둔 터였다.

아들은 쉽게 자물통을 따고 곳간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아비가 느닷없이 곳간 문을 닫고 자물통을 채워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큰소리로‘ 도둑이야!’를 연신 외치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한 순간곳간 속에 갇힌 아들은 너무나 황당하여 얼결에 바닥에주저앉고 말았다.

절망적이었다. 밖에서는 벌써 하인들이 횃불을 들고 뭐라 소리치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와중에 누군가 곳간을 향해 다가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아들은순간, 쥐들이 격렬히 싸우는 소리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바로 곳간 문이 열리고, 그 틈을 놓칠세라 아들은 문을 연 하인을 온힘을 모아 밀치고는 냅다,뛰기 시작했다.


담장을 단숨에 넘고 죽을힘을 다해 어둠 속을 달렸다.

횃불을 든 하인들이‘ 저놈 잡아라!’고 소리치면서 닿을 듯뒤쫓아 오는 것이 보였다. 아들은 마침 작은 연못가를 지나고 있었고 불현듯, 길섶에 박혀 있는 큰 호박덩이만한돌을 집어 캄캄한 연못 속으로 풍덩! 던져 넣었다. 다시 한참을 달리다 뒤돌아보니, 멀리 하인들이 연못 주위를 맴돌면서 물 위로 횃불을 이리저리 비추며 웅성거리는 모습이보였다.

그렇게 한숨 돌리게 된 아들은 무난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아들을 맞은 아비는 그제야 안심인 듯, 눈물을 글썽이며 대견하기 그지없는 아들을 품으면서 말했다‘. 장하다아들아!’도둑놈의 아들은 기어이‘ 도둑놈스런’ 도둑놈이 된 것이다.

선가에서 전해 내려오는 자내증(自內證)과 관련된 예화이다. 선가에서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누구도 대신해줄 수도 없는, 스스로 직접 증득한 깨달음을 자내증이라고한다.

그래서 깨달음의 경지를 묻는 제자에게, 스승은 이 한마디를 던져놓고 횅하니 나가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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