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준이 품격을 만든다

2013-07-1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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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만(목사)

깜깜한 밤바다를 전속력으로 항해하는 큰 군함이 가까운 거리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다른 배의 불빛을 발견하였다. 긴급 신호를 보냈다. “지금 즉시 진로를 남쪽으로 20도 바꾸라.” 상대방 배에서 이런 회신이 왔다. “그쪽에서 즉각 진로를 북쪽으로 20도 바꾸시오.” 함장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령관이다. 즉시 진로를 남쪽으로 바꾸라.” 거기에 대한 답신은 이랬다. “나는 일급 항해사요. 당신이 진로를 북으로 바꾸시오.” 사령관은 있는 대로 화가 나서 다시 신호를 보냈다. “다시 말하건대 진로를 남쪽으로 바꾸라. 아니면 발포하겠다. 나는 기함(旗艦)에 타고 있다.” 다시 답이 왔다. “나도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당신이 진로를 북으로 바꾸시오. 나는 등대(燈臺)에 있소!”


이 이야기는 절대적 기준의 수용을 거부하고 자신이 정해 놓은 편리한 상대적 기준에 따라 살아가기를 고집하는 현대인의 이기주의를 풍자하고 있다. 요즘 우리 사회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낳은 이기적 상대주의의 만연으로 휘청거리고 있다. 이기적 상대주의의 병폐가 제일 심한 곳은 정치권이다. 우리나라의 정치 리더들은 도무지 기준과 규범 없이 살아가는 듯하다. 필요에 따라 얼마나 말과 행동을 잘 바꾸는지 마치 파충류의 변색 본능을 보는 것 같다.

언뜻 보기에는 상대주의가 자유로운 변화를 보장해 주는 유연한 시스템 같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 반대다. 그 증거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안다. 그들은 5,000년 이상 나라 없는 디아스포라 민족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신비하게도 유일신 신앙의 정체성을 굳게 지키면서 지구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경주 최씨는 300년 이상 존경받는 부자의 지위를 지켜 온 명문 가문으로 유명하다. 그 비결이 무엇인가. 그것은 부(富)에 대한 엄격한 기준과 높은 도덕적 규범 때문이다. 첫째, 과거는 보되 진사(進士)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둘째, 만석의 재산을 모으지 말라. 셋째, 흉년에는 남의 논을 사지 말라. 넷째, 찾아 온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라. 다섯째, 근처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여섯째, 시집 온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이와 같은 엄격한 기준과 규범의 바탕위에 명문 경주 최씨 가문이 섰다.

공목(空木)을 아는가. 조판(組版)할 때 활자 행간에 끼우는 나무나 키가 작은 납 조각을 말한다. 공목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문장도 편집과 인쇄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안에 신앙과 윤리의 공목이 없으면 품격 있는 삶이 불가능하다.

다행히 우리 곁엔 최고의 기준을 제시하는 성경이 있다. 우리는 성경 읽기를 통해서 고상한 품격을 지켜 나갈 수 있다. 매일 독서를 삶의 엄격한 규범으로 삼고 살았던 조선의 문인 허균(許筠)은 송나라의 문인 장횡거의 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매일 독서는 마음을 지켜 준다. 그러나 책을 놓으면 덕성이 풀어진다. 책을 읽지 않으면 의리를 보더라도 보이지 않게 된다.” 당신의 품격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기준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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