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를 깨운 트루먼

2013-07-1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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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미국대통령선거때 이야기다, “만약 트루먼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면 우리 옆집아저씨도 대통령이 될 수 있어!”라고 사람들이 비아냥거렸다. 왜냐하면 루즈벨트 대통령의 큰 업적에 비해서 트루먼은 고등학교밖에 못 나온 미주리 시골뜨기로 천신만고 끝에 부통령이 되었다가, 루즈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나머지 임기를 채우는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부통령이 된 후에도 루즈벨트 대통령으로부터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철저히 무시를 당하였다. 그런 가운데 그는 잔여 임기를 마치고 다음선거에 도전한다.

이 선거는 트루먼 본인 외에는 아무도 트루먼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1948년 대통령선거 막바지 3주전, 뉴스위크 잡지사가 미국의 저명한 정치칼럼리스트 50명에게’누가 차기 대통령으로 뽑힐 것인가’하는 설문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50명전원이 트루먼의 상대후보이며 당시 뉴욕주지사였던 Dewey를 차기대통령으로 점찍었다. Dewey 50대 트루먼 0로. 또 라이프 잡지는 대통령선거가 있는 주일, 커버스토리에 “Dewey, The Next President”라고 게재하였다. 이 모든 수모와 부정적인 예견에도 불구하고 트루먼은 대선에 이겼다. 정치전문가들의 견해가 얼마나 틀릴 수 있나를 증명해준 좋은 예가 된 것이다. 이 선거의 승리로 인해 루즈벨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대통령이 됐던 트루먼을, 더 이상 국민들은 ‘우연히 된 대통령( Accidental President)’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늘 트루먼을 루즈벨트에 비교하며 얕보곤 했다, 루즈벨트는 하버드출신이고, 부유한 명문가집안, 성공한 사업가였다. 특히 미국을 큰 위기에서 두 번이나 구한 위대한 대통령으로, 1930년의 경제대공황 극복과 1939-1945의 세계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존경을 받아왔다. 이에 비해 트루먼은 대학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시골농사꾼 출신이고, 고등학교 졸업 후 철도 막노동, 은행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나중에는 아버지와 함께 농장을 했으나 빚만 늘어나 그만둔 후 너무나 형편이 안 좋아 단 1달러라도 악착같이 모아야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때마침 세계1차 대전이 일어나 궁여지책으로 군에 지원하려 했으나 지원 할 수 있는 연령이 이미 두 살이나 초과되었고 또 시력이 너무 나빠 신체검사에 불합격될 것이 염려되어, 시력검사용 차트를 비밀리에 모두 외어 신체검사에 합격해서 입대할 수 있었다. 그는 전투마다 언제나 선두에서 지휘하며 용감히 싸워 부대원들로부터 좋은 평판과 호감을 얻어 많은 친구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전쟁터에서 함께 싸운 친구들과의 인연이 후일 트루먼의 일생에 큰 계기를 만들어준다.

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온 트루먼은 군대에서 함께 한 유태인친구 Eddie Jacobson과 동업으로 켄사스 시티에 남자 의류점을 개업한다 Truman & Jacobson 이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이 가게는 얼마 후 갑자기 불어 닥친 불경기로 많은 빚을 지고 파산하고 만다, 그때 이미 40이 다 된 나이였다. 트루먼은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 가족의 생계가 막막할 지경이 되었다.

이럴 즈음 또 군대에서 사귄 친구 짐의 삼촌이며 켄사스지역 거물 민주당 정치인 펜더거스트를 소개받는다. 그리고 펜터거스트의 추천으로 처음 카운티행정 판사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이 인연이 계기가 되어 정치인으로 성장하여 후일 우여곡절 끝에 미국 대통령까지 된 것이다. 역사가들은 트루먼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는 파산으로 인하여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트루먼대통령의 생애에서 보듯이 한쪽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는 걸 볼 수 있다. 비록 무일푼인데도 불구하고 정치를 시작하여 미국대통령으로 성공한 저력은 무엇일까? 그는 미주리의 보잘 것 없는 시골뜨기였지만 그의 강점은 단순과 정직(Simple and Honest)’이었다. 그는 말을 섞지 않았다. 항상 직설적이고 또 의리를 끝까지 지켰다. 또 다른 그의 장점은 나라를 위한 강한 책임감이다. 그 유명한 ‘The Buck Stops Here!’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라는 구호를 대통령 집무실 책상위에 항상 놓아두고 일했다. 트루먼이 우리에게 일깨워준 가장 큰 유산은 보통사람도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트루먼과 다름없이 보통사람으로 열심히 산 나는? 왜 무엇이 이렇게 한 곳에 서성이게 붙잡고 있는가? 무모하게 저질러야 한다. 세월이 더 가기 전에, 꿈꾸는 그 무엇을 찾아 곰곰이 살아온 길을 돌아보니, 겁 없이 무조건 뛰어든 때가 내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외국신부님, 평화봉사단 친구들과 돌아다니며 배운 콩글리시로 국제종합건설 통역 입사, 사우디아라비아 담맘 현장 파견 사우디 석유차관 도움으로 미국비자, 생선 튀김가게, 헌터 칼리지, 모자 공장 밤일, 차이나타운 패들러 행상, 결혼, 옷가게, 다섯 애들 등등 끝없는 도전이 나의 원동력이었다. 그런 내가 언제부터인가, 유권자등록운동, 권익신장위원회 활동, 정치인들과의 만남, 또 정치인 모금운동을 하면서 주위의 인정과 평가를 의식하게 되었다. 변화를 모색하기 보다는 현실에 안주하게 되었다.

또, 순수함보다는 무엇을 기대하는 마음이 생겼다.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기보다는 다니는 길을 계속 다니고 있다. 생각에 바람이 들고, 아랫배에는 기름이 끼고, 눈에는 거만의 테가 끼었다. 자 이젠 나를 깨우고 또 묵은 때를 씻어내야 한다. 체면의 옷, 가식의 옷 말이다. 그리고 헛바람을 빼자. 있는 대로의 나를 다시 만나고 사막으로 나가자. 주어진 시간이 다하기 전에 가슴 뛰고 잠 못 이루는 그것을 찾아 나서야 한다. 희망을 버리지 말자. ?Never Lose Hope!"


박윤용(권익신장위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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