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슬로 에이징(Slow Aging)

2013-06-2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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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가면서

월초에 필라델피아를 다녀왔다. 숙소 근처에 100년 전에 만들어진 골프장이 있다. 일 년에 겨우 열두어번 치는 골프를 그곳에서 쳤다. 다행히 동료들이 가엽게 여겨 핸디캡을 받아 겨우 일당을 잃어버리는 정도의 실력이다.

푸른 하늘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넓고 넓은 잔디밭이 너무나 좋다. 이곳저곳으로 구르는 공을 찾다보면 그 곳에는 새로 핀 꽃도 고향에서 보던 나무들도 마주하게 된다. 하얀 공이 빠진 도랑에는 송사리가 한가로이 떼 지어 간다.

어릴적 시골에서 형들과 종종 냇가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었다. 내 키만큼이나 긴 족대를 들고 조그만 냇가에서 송사리, 미꾸라지, 새우, 가재 그리고 붕어 등을 잡는 것이 고작이었다. 주전자에 잡은 물고기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유난히 후텁지근하고 무더운 여름날의 저녁도 구수한 매운탕 냄새에 행복할 수 있었다. 골프장의 실개천은 송사리를 품고 송사리는 개구쟁이 시절의 고향으로 나를 날려보낸다.


형제들과 달리 나는 말썽꾸러기였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는 제일 무서운 분이셨다.

어머니의 눈에는 귀여운 장난꾸러기였지만 할머니에게는 버릇없는 손자였는지 모른다. 잘못을 저지르면 손들고 방구석에 서 있는 벌을 종종 받았다. 때로는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기도 했다. 동네 아이들한테 맞고 들어오면 훨씬 더 벌을 받았다. 핑계는 싸움질이지만 아마도 바보처럼 터지고 온다고 속이 상하셨나 보다. 외할머니는 적자생존의 방법을 말없이 가르친 무서운 선생님이셨다.

‘Time-out’은 미국식 자녀 훈육방법이다. 신체적으로 벌을 줄 수 없는 미국에서 자녀들을 벌주는 방법 중 하나이다. 입 다물고 말없이 얼마동안 무릎 꿇고 앉아 있든, 손들고 서 있든 간에 반성하라고 벌주는 것이 ‘time-out’이다.

가끔 식당에서 소리치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대하면 공연히 마음이 쓰인다. 아이들 부모에게는 기가 살아서 그렇다고 칭찬하지만 속내는 그렇지도 않다.

나이만큼 말도 많아지나 보다. 오랜만에 선배가 사무실로 와서 그동안 궁금하던 일들을 마치고 보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때마침 멀리서 온 친구에게 양해를 구해 점심에 동석하게 되었다. 몇 번의 탐색전이 끝나기가 무섭게 과거의 자랑스러운 훈장들을 하나씩 풀어놓으니 밥 먹으랴 말 듣고 맞장구치랴 2시간씩 걸리는 만만디식 중식을 해야 했다.

지혜의 세븐업이라는 것이 있다. ‘Pay Up’과 ‘Shut Up’도 ‘7-UP’ 중에 하나이다. ‘Pay Up’은 돈이든 일이든 자기 몫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Shut Up’은 말하기 보다는 듣기를 많이 하라는 것이다. 말 대신 박수를 많이 쳐주는 것이 존경과 환영을 받는 것이다. 지갑은 열수록 좋고 입은 닫을수록 현명하고 지혜로운 ‘UP’인 것이다.

골프를 치다 보면 저절로 조용하게 된다. 적어도 5시간 정도는 자기 공만 치고 다닌다. 혼자서 자신의 목표를 잡고 최선을 다하면서도 외롭지도 수다스럽지도 않다.


땅의 기운이 몸속에 스며들고 하늘로 치솟은 조그만 공은 바람에 몸을 맞기고 날고뛰고 구르다 멈춘다. 한 타 한 타 정성을 쏟으며 몇 시간은 말없이 쉽게 지나간다.

가끔 낯선 사람들 틈에서 말없이 골프를 치는 것이 즐겁다. 스스로 선택하는 ‘time-out’이다. 고독은 자신이 선택해서 홀로 있는 것이라면 외로움은 타인으로부터 소외된 경우로 서로 다른 개념이라고 한다.

‘느리게 살자’는 운동이 일고 있다. 빨리 빨리 시대에 ‘Slow Life’ 운동은 진지하게 천천히 살자는 것이다. 골프장 사이로 멈추듯 흐르는 개울물에 송사리는 슬로 라이프를 실천하고 있다. 100년이 지나도 의연히 손님을 기다리는 골프장이 우리들에게 속삭이는 것 같다. 느리게 살아야 나이도 천천히 먹는다고.


강 신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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